[김봉성의 고도를 기다리며]

[청년칼럼=김봉성]

[미스터 트롯]은 내게 소소한 재앙이었다. 아무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내가 주로 시청하는 예능에 나와 웃기지는 않은 채 내 취향이 아닌 노래를 불러댔다. 그것도 2주 분량으로. 해당 예능 고정 팬들은 불만을 토로했지만 시청률은 잘 나왔다. 수혜자일 때는 몰랐는데, 피해자가 되어보니 알겠다. 인구수가 깡패다.

TV 예능에서 불공정한 게임이 벌어지고 있다. 대중가요의 제목과 가수를 맞추는 게임에서 80년대 생인 나는 수혜자였다. 반면 90년대 후반에서 00년대 초반 출생한 Z세대들은 80~90년대 음악을 알 리 없는 피해자였다.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과 이끄는 사람들은 70년~80년대 출생한 ‘신인류’, ‘X세대’에 걸쳐 있었다. 그들은 청춘 BGM(백그라운드뮤직)을 그들끼리 공유했다. 어린 친구들은 듣도 보도 못한 노래에 흥겨운 아저씨 아줌마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시청자라고 다를까.

대중문화 판에서 세대학살이 벌어진다. 70년생 강호동, 72년생 유재석이 0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예능의 정점에 서 있다. 메인MC로 분류되는 김구라, 신동엽, 김성주, 전현무도 70년대생이고, 최근 약진한 여성 연예인 이영자는 68년생이고, 송은이, 김숙은 70년대생이다. 최근 도드라진 박나래, 장도연, 김희철, 장성규는 80년대생이다. 주목 받는 20대가 드물다. 연예 대상 15회로 이 분야 역사적 정점에 선 유재석은 데뷔 28년 만에 신인상까지 쓸어갔다. 대중은 그의 수상을 납득하고 축하함으로써 그들의 독과점을 인정했다.

이들을 소비하는 X세대는 힘이 세다. 00년 전후 출생한 Z세대를 압도한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필두로 대중문화 혁명을 이끌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임요환을 필두로 PC방과 e스포츠를 한국에 뿌리내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저, 인구수가 많기 때문이다. 2018년 기준 한국의 연령별 인구수는 0대 428만 명, 10대 503만 명, 20대 700만, 30대 744만 명, 40대 840만 명, 50대 850만 명이다. 2019년 출산율 1.0이 무너졌으니 당분간 어린 세대는 더 줄어들 것이다.

TV조선 미스터트롯의 유튜브 화면

여기에 구매력을 더하면 세대 격차는 더 벌어진다. X세대는 젊어서 IMF를 겪었지만 지금은 자판기 커피에서 스타벅스로 취향을 상향할 수 있게 되었다. 반면 Z세대는 부모보다 가난할 가능성이 높다. IMF 때보다 더한 실업률을 겪고 있다. 가성비와 소확행은 선택이 아니라 강제에 가까웠다. X세대가 좋아할 만한 대중문화에 더 많은 자본이 유입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더군다나 X세대는 지금 문화의 토대를 닦은 만큼 문화 소비에도 익숙하다. 자식 다 키운 5060 이상 세대도 [미스터 트롯]을 기점으로 문화를 적극적으로 소비하기 시작했다.

Z세대보다 X세대가 힘이 센 또 다른 이유는 Z세대의 문화적 파편화도 한몫한다. 이들은 동일성이 아니라 다양성의 시대를 산다. TV 채널만 해도 종편과 케이블로 다양해졌고, 거기에 넷플렉스, 유튜브까지 더해진다. 개인의 콘텐츠 소비 속도는 문화 자본의 콘텐츠 생산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므로 개인이 감상할 수 있는 콘텐츠는 무한에 수렴된다. 각자의 취향에 매몰될 수 있는 최적 환경이 구성된 것이다. 문화의 공유 영역은 좁아진다. 기껏 ‘4딸라’, ‘묻고 더블로 가.’ 같은 '밈'만 폭발적이나 일시적으로 소비된다.

90년대는 대중문화의 르네상스 시절이라고 하지만 기술적으로 지금만큼 다양할 수 없었다. TV 채널은 한정되었고, 인터넷이 폭넓게 보급되지도 못했다. 시청률 40-50%짜리 드라마나 20-30%짜리 예능이 심심찮게 쏟아졌다. 대중가요의 경우 생존 시간이 길었다. KBS는 5주 연속 1위를 한 가수에게 골든컵을 수여했고, 1위 횟수 제한을 걸지 않은 MBC에서는 신승훈과 '서태지와 아이들'이 10주 이상 1위를 유지했다. 이런 시간들은 좋든 싫든 ‘시절’을 형성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유행가’가 그 시간을 산 사람들의 의식 속에 시대의 무늬로 새겨졌다. ‘복고’의 토양이 기름진 것이다. 대중가요에 무관심했던 나조차 [무한도전] 토토가에서 소환된 90년대 노래들의 가사를 대부분 따라 부를 수 있었다.

지금의 대중가요는 시간 단위로 스트리밍 1위를 기록할 만큼 소비 속도가 빠르다. 전무후무한 방탄소년단도 국내 인기만 따지면 서태지나 HOT에 못 미친 듯하다. MaMa 투표에서 방탄은 엑소와 워너원과 경쟁했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은 누구와도 경쟁하지 않았고, HOT는 젝키를 압도했다. 그러나 2020년, 유튜브 조회수 기록을 갈아 치우는 블랙핑크도 멜론에서 임영웅에게 밀렸다. 요즘 정점에 선 가수들은 제각각의 거대 팬덤은 존재하나 유행가는 없다. 으르렁 대는 엑소와 불타오른 방탄소년단을 72년생 유산슬이 싹 다 갈아엎어 버렸다.

미스터 트롯맨들이 TV를 휩쓰는 동안 나는 피해자였지만, 나는 다시 수혜자로 돌아섰다. 유재석-이효리-비가 싹쓰리로 뭉쳐 차트를 싹 쓰는 중이다. 테이프에서 cd를 거쳐 mp3에 익숙했던 X세대는 스트리밍에도 적응했다. 새로운 것이 아니면 태워버리라는 서태지의 구호대로 새로운 것을 접하고 만들어 온 X세대에게 기술적 새로움에 적응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이효리와 비는 내 취향과 무관하게 90년대를 공유할 수 있는 콘텐츠다. 익숙한 것들의 귀환이 반갑고 편안하다.

Z세대는 내가 미스터 트롯맨들을 보듯이 싹쓰리를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유튜브로 옮겨가는 현상은 가속되어 Z세대의 대중은 쪼개져 군소 매니아만 남는다. 그들이 싹쓰리 현상을 즐기는 것도 안타깝다. 그들만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윗세대 문화를 재탕하여 소비하는 것은 청춘과 어울리지 않는다. 가끔은 복고가 유행할 수 있다지만 2014년부터 시작된 [무한도전] 토토가 현상은 진행 중이다. 다시 말하지만, 인구수가 깡패다.

30년 후에 등장할 노인들은 기존 노인의 개념을 벗어날 것이다. 이들, 아니 (내가 속할 그룹이므로) 우리는 여전히 문화의 중심에 있을 것이다. 10대 취향의 아이돌이 아니라 70대 취향의 아이돌이 돈이 되는 시대가 머지않았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복제한 그룹에 나는 반드시 지갑을 열 것이다. 이런 시대에는 노인 혐오보다는 청년 혐오가 힘이 세 질지도 모르겠다. 인구수도, 자본력도, 상대가 안 된다. 청년들이 이해하든 말든 우리는 ‘제 전투력은 53만입니다.’라며 으스댈 것이다. 초시니어인(超senior人)이 온다. 유교 시대와 또 다른 노인 중심의 세상이 궁금하면서도 썩 유쾌하지는 않다.

   김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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