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경의 현대인의 고전읽기]-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Death of a Salesman)

[논개칼럼=김호경]

'세일즈맨의 죽음'의 포스터

세상의 모든 것을 담은 007 가방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다방이라는 곳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불청객 한 명이 슬며시 다가왔다. 그는 감청색 혹은 검은색 양복에 빨간 넥타이를 매고 검은색 007 가방을 들었다.

“안녕하십니까. 좋은 물건 있는데 한번 보시렵니까?”

인사는 정중하지만 허락도 받지 않고 빈자리에 털썩 앉아 가방을 열면 그 안에 온갖 진귀한 물건이 가득했다. 던힐 라이터, 금장 롤렉스 손목시계, Made in USA 군용 나침반, 스위스 아미 나이프... 적어도 50가지가 넘는 소품들이 호기롭게 빛을 발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 안에 전부 있는 듯싶었다. 대부분 짝퉁 아니면 밀수품이었고, 그 효능을 절대 입증할 수 없는 정체불명의 성(性) 의약품도 있었다. 신기해서 고개를 길게 빼고 구경하다가 가짜인 줄 뻔히 알면서도 싼 맛에 한두 개를 팔아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 떠돌이 외판원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어찌 그뿐이랴.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급속히 넘어가던 1970~80년대에는 이 땅에 외판원들이 넘쳐났다. 30권 세트 <세계문학전집>, 50장 세트 <세계의 클래식 대전집>, 미제 <싱어 재봉틀>, 국산 <브라더 재봉틀>, 신앙촌에서 만든 <캐시미어 담요>, 금성사 <트랜지스터 라디오>.... 우리 삶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팔았고, 한 달에 한번 수금을 하기 위해 집으로 찾아왔다.

아버지는 <삼천리호 스탠다드형 자전거>를 24개월 할부로 샀고, 어머니는 파란색 브라더 재봉틀을 36개월 할부로 샀고, 나는 80년대 초 대학시절에 <창작과 비평> 영인본 20권을 12개월 할부로 샀다. 그리고 1년 동안 할부금을 갚느라 무진 애를 썼다.

그 외판원(세일즈맨)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세일즈맨의 죽음'의 저자 아서 밀러는 현대 미국인의 부조리한 삶을 파헤친 극작가이다. @김호경

시대를 거부하는 늙은 세일즈맨

윌리 로먼은 세일즈맨이다. 늙은 아내와 함께 뉴욕에 산다. 집에 머무는 날보다 필라델피아, 피츠버그, 보스턴, 포틀랜드로 돌아다니느라 밖에서 자는 날이 더 많다. 물건을 팔기 위해서다. 낡은 시보레를 몰고 수없이 많은 도시의 수없이 많은 회사, 공장, 사무실, 식당, 슈퍼를 구두가 닳도록 찾아간다. 용도계 직원을 만나 팸플릿을 주고, 제품 설명을 하고, 운이 좋으면 사장을 만나 커피 한잔을 얻어 마시고, 물건을 팔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는 평생 그 일을 하며 살았다.

돈을 많이 벌지는 못했으나 천만다행으로 아내는 ‘현모양처’의 전형이었고 어린 아들 둘은 잘 자라주었다. 아들들은 모두 아버지를 존경했으며, 대도시를 여행하는 것에 동경심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로먼은 아들들에게 여름이 되거든 함께 대도시를 순회하자고 말한다.

“도시란 도시는 다 보여주지... 아버지를 모르는 사람이 없어. 뉴잉글랜드 어디서건 다 알지... 너희들을 데리구 가면 어딜 가나 대환영일 게다. 그건 말야, 아버진 친구가 많거든. 뉴잉글랜드 거리마다 차를 세울 수 있구, 순경들은 마치 자기 차처럼 잘 봐주거든.”

그 말이 진실이라면, 로먼은 지금쯤 부자가 되었어야 하고, 중류층 아파트에 살았어야 하고, 외판원이 아닌 영업 관리부장으로 사무실에 앉아 직원들을 관리하는 일을 했어야 하건만 어찌 된 일인지 63세가 되어서도 힘겹게 외판원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불쑥 불쑥 사람들이 자신을 꺼려한다는 불만과 괴로움을 털어놓는다. 두툼한 카탈로그에 의한 우편판매제도가 외판 시스템을 몰아내는 시대에 그는 옛 방식을 고집한다. 그 방식 외에는 별다른 기술이 없기 때문에!

큰아들이 목격한 것은 무엇일까?

그를 괴롭게 하는 또 다른 요인은 두 아들이다. 특히 큰아들 비프와는 앙숙이 되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보통 정도만 되었어도 그 가정은 커다란 비극을 피할 수 있었으련만 로먼의 ‘남자로서의 욕망’은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고 만다. 과연 남자는 성적 욕망을 자제할 수 없는 것일까?

어려서부터 운동선수로 촉망받았던 비프는 장차 위대한 프로선수가 될 것이 분명했다. 고3 때 “수학에서 낙제하면 졸업장을 받을 수 없다”는 경고를 무시한 것이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암덩어리가 되었다. 낙제 통보를 받은 비프는 가방 하나를 들고 아버지가 머물고 있는 보스턴으로 무작정 간다. 그때까지만 해도 존경하는 아버지를 만나 상의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모텔 문을 열었을 때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였을까?

흔히 <세일즈맨의 죽음>에 대해 ‘현대 미국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라 평가한다. 과연 그럴까? 윌리 로먼은 성실의 표본이며 모범 가장의 본보기이다. 그러한 그가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자본주의의 모순이 아니다. 미국 사회의 모순을 지적하기에 앞서 한 인간의 부도덕한 행위를 먼저 지적해야 한다. 로먼은 돈 때문에 죽었을까? 아니면 여자 때문에 죽었을까?

더 알아두기

1. 아서 밀러(Arthur Miller)는 1915년 뉴욕의 중류가정에서 출생했으나 대공황으로 집이 몰락하여 고교 졸업 후 접시닦이, 사환, 운전사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어렵사리 미시간대학 연극과를 졸업했으며 이 경험으로 훗날 세계적인 극작가가 되었다.

2. 미국의 섹시 심벌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는 16세 때 항공사 정비공 짐 도허티와 첫 결혼을 했고,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와 두 번째 결혼했으나 274일 만에 이혼했다. 세 번째 결혼한 남자가 아서 밀러이다. 그러나 곧 두 사람은 헤어졌다. 밀러 역시 세 번 결혼했다.

아서 밀러와 세 번째로 결혼한 마릴린 먼로 @김호경

3. 미국의 3대 극작가는 아서 밀러, 테네시 윌리엄스, 유진 오닐을 꼽는다. 윌리엄스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오닐은 <밤으로의 긴 여로>가 대표작이다.

테네시 윌리엄스는 명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남겼다. @김호경

4. 밀러의 또 다른 희곡 <모두가 나의 아들>(All my sons: a drama in three acts)은 2차대전 중 잘못된 비행기 부품을 조립하여 조종사 21명이 전사하는 사건을 그린 작품이다. 돈을 벌기 위해 부정한 행동을 저지르는 자본주의 사업가의 비리를 고발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행태는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5. 그 외에 한번쯤 읽어야 할 희곡으로는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에드워드 올비의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조지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의 <현자 나탄>, 셰익스피어의 <햄릿>, <오델로>, 페터 한트케의 <관객모독> 등이다.

6. 미국에서의 현대 세일즈맨(외판원)의 역사에 대해서는 월터 A. 프리드만의 <세일즈맨의 탄생>이 가장 재미있다.

 김호경

1997년 장편 <낯선 천국>으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여러 편의 여행기를 비롯해 스크린 소설 <국제시장>, <명량>을 썼고, 2017년 장편 <삼남극장>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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