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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암(耕岩) 송금조 선생 영전에[허영섭의 세상구경]
허영섭 | 승인 2020.07.28 09:35

[논객칼럼=허영섭]

부산 토박이 기업인으로 교육·문화 진흥과 지역발전에 이바지해 온 송금조 경암교육문화재단 이사장이 지난 21일 타계했다. 해방 이후부터 1990년대에 걸쳐 태양약품, 태양사, 태양산업, 태양화성 등으로 이어지는 자수성가의 성공 신화를 기록한 향토 사업가다. 비록 중앙무대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고 해도 전성기 시절에는 몇해 동안이나 부산에서 개인소득세 1위를 기록했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렇게 사업에 매달리며 기력을 쏟아붓고도 97세를 일기로 마지막 눈을 감았으니, 이 험난한 세상에서 천수를 누린 셈이다.

내가 이렇듯 고인을 추모하는 것은 나름대로의 인연 때문이다. 그가 세상에 남긴 자서전 ‘나는 여기까지 왔다’를 대필한 입장이니, 그리 간단한 인연은 아니다. 고인이 살아 온 얘기를 구술 받으려고 부산에 내려간 것은 기껏 두어 차례에 불과했지만, 그때마다 자택에서 집중 인터뷰가 이뤄졌다. 부인 진애언 여사가 손수 차려 준 식탁에서 식사를 같이 하기도 했고, 자갈치 시장과 해운대 외출에도 동행했다. 고인이 구순에 들어섰던 2013년의 일이다. 지금도 그때의 여러 기억들이 마치 영화 장면인 듯이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선명한 것은 성지곡 수원지 산책길에 따라나섰던 기억이다. 백양산 기슭 계곡에 조성된 수원지를 한 바퀴 돌면서 편백의 삼림욕까지 겸한 늦은 오후의 산책이었다. 산책도 산책이었지만 그 입구 어린이대공원에 세워져 있는 요산(樂山) 김정한 선생의 문학비를 보여주려는 데 더 뜻이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자신이 오십줄에 들어섰을 무렵 ‘경암(耕岩)’이라는 아호를 지어준 인생의 스승이라고 했다. 고인은 그날따라 지팡이를 짚고도 다시 어린시절로 되돌아간 듯이 매우 들뜬 기분으로 나무 계단을 올랐다.

@허영섭

사실이지, ‘경암’이라는 아호에 대한 고인의 애착은 남달랐다. ‘바위 밭을 일군다’는 의미 그대로 일생 동안 여러 사업을 일으키면서 마치 돌멩이를 걷어내며 자갈밭을 갈 듯이 살아 온 자신의 인생 역정을 결부시키기에 너무나 적절한 뜻으로 받아들였을 법하다. 더 나아가 부산을 무대로 활동했으면서도 한국 문단의 큰별로 자리 잡은 요산 선생으로부터 개인적 감화를 받지 않았을 리 없다. 요산문학상 제정 때도 군말없이 종자돈을 흔쾌히 내놓은 게 바로 고인이었다.

고인이 이룩한 업적 중에서도 가장 평가받을 만한 것은 역시 경암교육문화재단을 설립해 해마다 학술·문화 분야 공헌자들의 공로를 기리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부문별로 개인당 2억원의 상금이 수여된다는 점에서 호암상을 제외한다면 국내에서는 그만큼 권위를 인정받는다고 할 수 있다. 꼭 상금 액수가 많아서가 아니다. 2005년 제1회 시상식에서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를 비롯해 조동일·백융기·이병기 교수가 수상 테이프를 끊은 이래 벌써 15회까지 시상식이 이어졌고, 올해도 이미 추천서 접수가 끝나 영예의 주인공들 발표만 남겨놓고 있다.

다른 하나는 부산대 발전기금으로 305억원을 쾌척키로 한 것이지만, 이 약정에 있어서는 도중에 마찰이 생겨 법정 소송으로까지 번지는 결과가 초래되고 만 것이 안타깝다. 부산대가 양산에 제2캠퍼스를 설립한다고 해서 애초 그 부지대금으로 발전기금을 내기로 했으나 당시 부산대 최고 책임자들이 약속을 어기고 다른 용도로 전용하는 바람에 생긴 일이다. 어려서 제대로 학업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으로 고향인 양산에 부산대 캠퍼스를 세우는 데 기여하겠다고 마음먹었다가 오히려 상처만 받고 만 것이었다. 그 직후 경암교육문화재단을 설립한 것도 아마 이러한 마찰이 직접적인 동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자기 생활에서는 깎듯이 아끼고 살면서 사회와 이웃을 위해 큰돈을 선뜻 내놓은 결단을 기억해야 한다. 약품 도매상에서 시작해 미곡상, 정미소, 술도가 등으로 사업을 점차 확대하는 과정에서 세상의 단맛, 쓴맛을 모두 겪으며 모은 돈이었을 터다. 섬유염료 생산이나 몰리브덴 광산사업에 뛰어들었다가 낭패를 치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당시 김현옥 부산시장이 서울시장으로 발탁되자 부산시 자문위원이던 고인에게 “서울로 같이 가자”고 권유했다는 사실에서도 그의 진면목을 짐작하게 된다.

나로서는 생활에 쫓기던 즈음 집필료 때문에 시작한 일이었건만 결과적으로 고인에게 상당한 교훈을 깨우쳤음을 뒤늦게나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소탈하고 검소하게 지내던 모습은 요즘 젊은이들도 배워야 할 덕목이다.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해진 고리타분한 책상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는가 하면, 간편한 전자계산기조차 마다하고 묵직한 주판을 그대로 놓아두고 있었다. 사업이 번창할 때도 혼자 식사할 때는 짜장면으로 때울 만큼 구두쇠였다고 했거니와 아흔줄 연세에 들어선 당시도 중요한 계산은 주판알을 움직이며 직접 확인해 봐야 직성이 풀린다는 얘기에서 그의 성공 비결을 깨달을 수 있었다. 지난 기억을 더듬으면서도 아들뻘인 나에게 시종 공대말을 잃지 않았던 분이다. 지금도 그가 베풀어준 따스한 배려가 느껴진다.

고인의 유해는 지난 25일 영결식을 마친 뒤 고향 양산의 볕바른 터에 묻혔다. 보통학교를 마치고 열일곱 살의 나이로 부산 광복동 거리의 일본인 약품회사에 들어가면서 외지 생활을 시작한 이래 80년 만의 ‘영원한 귀향’이다. 영결식에는 참석하지도 못한 채 그의 자서전을 다시 펼치려니 갑자기 눈물이 쏟아진다. 대필자라고 해서 고인이 친필로 ‘송금조(宋金祚)’라고 당신의 함자를 적어 보내준 것이다. ‘나는 여기까지 왔다’는 자서전의 제목이 또 다른 묘비명으로 기억될 것이다. 경암 선생의 편안한 영면을 기원한다.

 허영섭

 이데일리 논설실장(현)
 세계바둑교류협회 회장
 전경련 근무
 뿌리깊은나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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