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선의 너영나영]

[논객칼럼=황진선]

-300년 넘게 김상헌 찬양, 최명길은 폄하

-조선 후기, 주자학을 절대 진리로 여긴 탓

-사회주의 혁명보다 300년 앞서 사상을 현실에 적용해

-중화주의에 몰입해 조선중화론까지 이어져

'인조의 나라' 책 표지@저자 제공

흔히 역사는 오늘의 거울이요, 내일의 길잡이라고 한다. E.H.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과거가 우리에게 유의미한 사건이 되려면 현재의 시각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평가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왕조나 지배집단 중심으로 서술된 한국사가 요즘엔 민중사, 생활사에 좀더 초점이 맞춰지고 있는 것이 한 예다.

‘인조의 나라, 주자학은 조선후기를 어떻게 망쳤나’ (김형진 저, 「새로운 사람들」)는 역사의 정의에 충실하다. 인간의 구원과 삶의 의미를 탐구한 ‘도스토예프스키 말하다’를 2017년 출간해 글 잘 쓰는 변호사로 이름을 알린 저자는 역사가 오늘을 비춰주는 거울이 되지 못한다면 죽은 역사라고 말한다.

주화와 척화, ‘강제화해’ 역사에서 교훈 얻을 수 없어

‘인조의 나라’ 같은 역사서를 본 적이 없다. 역사서가 역사가들의 전유물일 수는 없다. 저자는 주류사학의 일반 해석을 거부한다. 독자들 중엔 조선 역사에 대한 개안(開眼), 곧 새로운 눈뜸을 경험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저자를 분발케 한 것은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주화파(主和派) 이조판서 최명길과 척화파(斥和派) 예조판서 김상헌에 대해 내린 조선 사대부, 곧 문무 양반 계층의 잘못된 평가가 지금까지도 살아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는 역사의 임무를 방기한 것일 수밖에 없다. 저자는 300년이 넘도록 최명길은 역적, 비열한, 소인배로 치부한 반면 김상헌은 절의(節義)를 높인 인물로 존숭해온 잘못된 역사관을 버리고 새로운 평가와 가치관을 세워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가 인용한 인조실록을 따라 읽다보면 그런 지적에 고개를 끄떡이지 않을 수 없다. 김상헌 등 척화파를 그렇게 오랫동안 숭배해온 데 대해 화가 치민다. 그들은 우물안 개구리처럼 중국만을 하늘로 바라보는 자폐적 삶을 살았을 뿐, 나라의 미래와 백성의 삶은 안중에 없었다. 최근 들어 우리 국사학계에서 최명길에 대한 호의적 평판이 늘어나고 있지만, 아직도 김상헌과 같은 위치에 놓는 것이 고작이다. 저자는 최명길과 김상헌의 주화와 척화가 모두 나라를 위하는 우국충정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강단의 주류사학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같은 두루뭉술한 ‘강제 화해’로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남한산성 포위 속에서도 최명길 목 베어야 주장

당시 남한산성에 유폐된 조정 대신들은 대부분 청 태종 누르하치의 군대에 항복하지 않으면 대학살을 당할 뿐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청과 화친해야 한다는 주장을 배척했다. 최명길을 비롯한 주화파는 ‘한줌’(「최명길 평전」을 낸 한명기는 척화파와 주화파 비율이 95%와 5%였다고 한다)에 지나지 않았다. 척화파는 “국가가 보존된 뒤에야 바야흐로 와신상담(臥薪嘗膽)도 할 수 있다”(1637년 인조실록 인조 15년 1월2일)고 말하는 최명길의 목을 베야 한다느니, 수판으로 얼굴을 내려치고 싶다느니 극언을 퍼부었다.

김상헌은 1637년 1월9일 최명길 등이 인조에게 화친을 위한 국서를 보내도록 허락을 받자 인조를 독대해 반대했고 1월18일엔 최명길이 작성한 항복 국서를 찢어버린 후 인조를 알현해 “국서를 찢어 이미 사죄(死罪, 사형에 처할 범죄)를 범하였으니, 먼저 신(臣, 임금을 상대해 자신을 가리키는 말)을 주벌(誅罰, 죄인을 처벌함)하고, 다시 깊이 생각하소서”라고 했다.

국가 망하더라도 명나라 은혜 배반 안 돼

당시 척화파의 분위기를 적확하게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이조참판 정온의 차자(箚子, 약식 상소문)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천하의 국가가 길이 보존되기만 하고 망하지 않는 경우가 어디에 있습니까. 무릎을 꿇고 망하기보다는 차라리 정도(正道)를 지키며 사직을 위하여 죽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아, 명나라에 대한 … 부자 같은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으며, 군신의 의리를 어떻게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없는 법인데 최명길은 … 두 임금을 만들려고 합니다. …전하께서는 최명길의 말을 통렬히 배척하여 나라를 팔아넘긴 죄를 바로 잡으소서”.(인조실록 인조 15년 1월19일) 두 태양과 두 임금은 명나라와 청나라 황제를 뜻한다. 척화론자들은 두 임금을 섬기는 것, 즉 청에 항복을 하면 두 임금을 모시지 않는다는 군신의 예를 저버린 것이므로 나라가 망하는 것보다 더 큰 수치로 여겼다.

호기롭게 반대했지만 죽음으로 결사항전 보여준 사대부 없어

그런데 그런 호기로운 반대가 스스로 무기를 들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저자에 따르면 ‘죽더라도 머리를 숙이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척화파의 무기는 세치 혀와 붓, 그리고 흰 손뿐이었다. 인조는 1636년 12월14일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지 45일 만인 1637년 1월30일 세자와 신하 500여 명과 함께 삼전도에 나가 청나라의 황제 앞에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닿도록 숙이는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를 올리며 항복했다. 김상헌은 항복 직후 목을 맸는데 자손들이 구조하여 죽지 않았다. 최명길은 “그가 스스로 목을 매 죽으려 할 때 그 아들이 옆에 있었습니다. 이러고도 죽을 자가 있겠습니까”(인조실록 인조15년 9월6일)라고 했다.

‘자살 소동’으로 절의를 보여주려 했던 것일까. 명망있는 유학자나 관리들 중에 죽음으로 의지를 표현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척화의 수괴를 잡아내라는 청나라의 요구에 응해 ‘삼학사’ 홍익한 윤집 오달제가 청에 끌려가 죽었는데, 윤집과 오달제는 척화파 가운데 가장 젊었다. 척화파의 대표격인 김상헌, 정온이 스스로 가겠다고 고집했다면 그들을 대신하지 못했을 이유가 없었으리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오랑캐의 추장 모신 것을 치욕으로 여길 뿐... 백성 고초는 관심 없어

당시 사대부들은 명나라 황제가 아닌 ‘오랑캐의 추장’ 청 황제를 모심으로써 중화주의를 저버리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을 뿐, 제 눈앞의 군사와 백성, 무고한 민초들을 어육(魚肉)으로 만들고, 수많은 생령(生靈)들을 외침에 짓밟히게 하고, 나중에 환향녀(還鄕女) 또는 화냥년으로 돌아온 죄 없는 부녀자들과 양민 수십만명이 한겨울에 맨발로 포로로 끌려가 비참한 노예의 삶을 산 데 대해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다. 사회적 신분에 걸맞는 책임감을 보여주는 기록도 찾기 어렵다. 그들은 바로 전에 임진왜란(1592~1598년)과 정묘호란(1627년)을 겪었지만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척화파를 이끈 김상헌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인조가 삼전도에 나가 항복하기 이틀 전 기록이다. “강상(綱常,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과 절의(節義)가 이… 사람 덕분에 일으켜 세워졌다”.(인조실록 인조 15년 1월 28일)

주자학의 중화주의를 절대진리로 여겨, 러시아 혁명보다 300년 앞서 사상을 현실에 적용

이런 독단적이면서도 허망한 시각은 어디서 연원한 것인가. 저자는 주자학의 핵심 가르침인 존주대의(尊周大義), 즉 주(周)나라 이후 중국을 세계 문명의 중심으로 여기는 중화주의를 절대 진리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당시 주자학은 여러 사상 중 하나가 아니라 단 하나의 진리, 우주와 역사, 창생을 관통하는 불변의 정의였다. 이에 대한 반론이자 의심은 바로 진리에 대한 도전이자, 야만의 징표였다. 이를테면 사대부들은 삼전도 비문을 작성하지 않으려고 갖은 핑계를 댔고, 마지못해 비문을 작성한 이경석은 영의정을 지냈음에도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묘지 봉분 앞에 비석을 세우지 못하게 했다. 저자는 조선 후기가 마르크스 이념에 기반을 두고 성사시킨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보다 거의 300년 이상 앞서서 사상을 현실에 적용한 첫 사례라고 본다. 마르크스 유물변증법과는 반대로 상부구조인 주자학 이데올로기가 하부구조인 사회경제적 물적 기반을 막은 최초의 국가라고도 했다.

주자학은 양반 이익 대변 안성맞춤 이데올로기… 민을 통제하는 예론으로 흘러

저자는 주자학이 체제유지와 양반층의 정치적 위상과 경제적 이익을 공고히 하는 데 안성맞춤인 이데올로기였다고 말한다. 주자학은 조선 건국 초기에는 고려 말 문물제도를 정비하는 추진력으로 작용했지만 점차 진취적 발전 동력은 사라지고 실생활과의 연결성을 잃은 채 사변적 논쟁과 예의범절을 따지는 예학으로 이동했다. 주자학의 요체는 누구나 기(氣)로 이루어진 오욕칠정의 불순물 덩어리를 제거하고 순수하고 맑고 완전무결한 리(理)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유학자들은 주자학을 타자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실천론과 인격론으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대신 사실상 법률과 도덕, 윤리를 통합한 예론(禮論)으로 발전시켜 피지배계급인 민을 통제하고 수탈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예론의 중시는 2차에 걸친 예송논쟁(禮訟論爭)에서도 드러난다. 서인과 남인은 1659년(효종 10년)과 1664년(현종 15년) 각각 효종과 효종 비가 죽었을 때 살아있던 효종의 어머니 조 대비가 상복을 입는 기간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였다.

@책 표지 앞 뒷면

인조 때 유교화 완성... 이후 계층 내 헤게모니 싸움, 재조지은에 집착

저자는 인조 때에 장자 상속제가 자리를 잡는 등 관례, 혼례, 상례, 제례 등 모든 면에서 유교화, 중국화가 완성된 것으로 본다. 양반, 평민, 노예로 이루어진 신분제 사회구성체를 기반으로 관료와 유학자의 사회경제적 우위를 넘볼 수 없게 했다는 것이다. 백성은 통치 대상에 불과할 뿐이었다. 조선 사회에선 서구의 부르주와 같은 신흥계급이 자라날 수 없었다. 사대부들은 경국대전에 의해 그들에게 부과되었던 국방, 납세, 근로의 의무 중 어느 것도 부담을 지지 않는 방향으로 관습법을 형성했다. 정치 사안에 대해 당파를 갈라 치열하게 다투었지만 그것은 같은 계습 내 헤게모니, 패권 싸움이었을 뿐이다.

여기에 더해 사대부들은 재조지은(再造之恩), 즉 임진왜란 때 명이 군대를 보내 조선을 다시 세워준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의리론까지 내세웠다. 인조반정 직후, 명나라와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 사이에 중립외교를 펼쳤던 광해군의 폐위와 관련해 임진왜란 당시 임금인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가 반포한 교서가 이를 잘 보여준다. “중국 조정을 섬겨온 것이 2백여년이다. 의리로는 군신이며 은혜로는 부자와 같다. 임진년에 재조(再造)해준 그 은혜는 만세토록 잊을 수 없는 것이다”.(인조실록 인조1년 3월14일)

명 멸망 후에도 300년 이상 사대관계

마지막 황제 연호 숭정 계속 사용, 만동묘와 대보단 세워 중국 세 황제 신위 모셔

영조와 정조도 지극정성 제사

명나라는 병자호란 8년 후 1644년 청나라에 의해 망했지만 조선은 존주대의와 재조지은에 집착하며 300년 이상 가상적인 사대관계를 유지하며 숭모 의식을 더 강화했다. 계속해서 명 황제의 연호인 숭정(崇禎)을 사용했다. 1704년(숙종 30년) 권상하는 스승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그가 살았던 충북 괴산 화양동 서원에 만동묘(萬東廟)를 세워 임진왜란 때 군사를 파견해 도와준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 재위 1573~1620)와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 숭정제(崇禎帝, 재위 1627~1644)의 신위와 제사를 모셨다. 만동묘는 충신의 절개는 꺽을 수 없다는 뜻의 만절필동(萬折必東, 황하는 만번을 꺽여도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순자의 말)에서 딴 것인데 명나라의 재조지은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숙종(재위 1674~1720), 영조(재위 1724~1776), 정조(재위 1776~1800)도 사상의 굴레를 피해가지 못했다. 숙종은 만동묘에 자극을 받아 같은 해에 서울 창덕궁에 같은 목적의 대보단(大報壇, 큰 은혜를 기리는 제단)을 세우고 두 황제에 대한 제사를 국가 행사로 격상했다. 영조는 두 황제에 더해 명 태조인 홍무제까지 대보단에 모시고 재위 기간 지극정성으로 행사를 주관했다. 개혁과 탕평에 힘썼다는 정조도 국왕 가운데 가장 부지런히 대보단에 나가 망배례를 했으며 그것을 조선의 의리로 여겼다. 여기에다 정조는 만동묘를 세우도록 유언한 송시열을 공자나 주자 못지 않은 성인으로 존칭했다. 그는 자신의 명으로 엮은 ‘양현전심록(兩賢傳心錄)’ 서문에서 “우리나라에 송시열이 있음은 송나라에 주자가 있음과 같다”며 그의 문집을 ‘송자대전(宋子大全)’이라고 높였다.

인조시대는 조선후기 방향타, 중화질서 벗어날 절호 기회 놓치고 조선중화론까지 이어져

김상헌 후손, 명문 부상... 정승만 12명 나와, 왕의 외척으로 60년 세도정치

인조 시대의 병자호란은 중화질서의 몰락과 중국 민족과 주변 오랑캐로 문명과 야만을 나누었던 화이(華夷)의 가치관의 허구성을 간파해 새 시대로 나아갈 수 절호의 기회였지만 조선의 왕과 관리들은 거꾸로 존명배청(尊名排淸)에 더 몰두했다. 인조 이후 왕들은 모두 그의 후손이다. 저자는 조선 후기를 인조의 나라라고 정의한다. 조선 후기가 그로부터 시발된 데다 조선 후기를 규정한 정치적/사상적/경제적 구조의 원형이 구축돼 1910년 경술국치로 일본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250여 년의 방향이 정해졌다는 것이다.

명나라 문화와 사상의 중심 역할을 조선이 물려받았다는 조선중화론은 송시열 등 철저한 주자학 원칙주의자이자 숭명배청주의자들의 작품이었다. 18세기 후반에는 명의 정통성을 온전히 이어받은 조선만이 역사를 편찬할 자격이 있다는 데까지 이르러 많은 학자들이 명의 역사서를 저술하기까지 했다. 김상헌이 인조 이후 역사의 승자가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대표적 명문으로 부상한 김상헌의 후손에서는 12명의 정승과 3명의 왕비, 수십명의 판서가 나왔다. 김조순의 딸이 순조비가 되면서 그 자손이 정승, 판서를 독차치하는 안동 김씨 60년 세도정치까지 출현했다.

삼사도 특정 당파 대변, 소현세자 죽음은 인조 독살 정황

저자는 중국과 고려의 대간(臺諫) 제도를 모방한 삼사(三司: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의 역할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당초 삼사는 왕과 재상에게 직언을 해 독재를 견제하고 탄핵을 행사하도록 구상한 것이지만 당쟁이 격화하면서 공의나 공론이 아니라 특정 계파의 당론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청의 침입을 목전에 둔 1636년 10월 홍문관에서는 “…지금 비록 불행하여 큰 화가 당장 닥친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죽음이 있을지언정 두 마음을 가져서는 아니 됩니다”라고 했다. 사헌부와 사간원 관료들은 최명길 등이 인조에게 화친을 위한 국서를 보내도록 허락을 받자 1월11일 “…사신을 보내는 일을 속히 정지시키소서”라고 했다.

소현세자에 대한 평가도 눈에 띈다. 청나라에 끌려갔던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는 청의 사신과 함께 귀국한 지 2개월여 만인 1645년 4월23일 발병한다. 어의(御醫)가 학질이라고 진맥하고 이형익이 이틀에 걸쳐 침을 놓았는데 사흘만인 4월26일 사망했다. 34세. “온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오므로… 얼굴 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1645년 인조실록 인조 23년 6월27일) 그러나 인조는 이형익을 두둔했다. 세자의 입관을 서두르고 장례의 격을 낮췄다. 3년간 입어야 할 자신의 상복 착용 기간을 일주일로 줄이고 1년간 입어야 할 신하들의 복제도 석달로 단축했다.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은 자신이 먹을 전복구이에 독을 넣었다고 의심해 폐출한 후 사사(賜死)했다. 인조는 강빈의 어머니와 형제까지 죽이고 친손자인 이석철 이석린 이석격을 제주에 유배시켰는데 불과 1년 정도 만에 풍토병으로 사망했다.

저자는 여러 정황이 인조의 독살로 향하고 있다고 본다. 인조의 권력에 대한 집착과 협량, 청나라가 자신을 퇴위시키고 언제든지 소현세자를 옹립할 수 있다는 의심과 불안감이 작동했다는 것이다.

 

소현세자 임금 됐다면 중화주의 벗어났을 가능성

저자는 소현세자의 사망을 우리 역사의 아쉬운 장면으로 꼽는 데 동의한다. 청나라를 잘 알고 서양문물에 호의와 관심을 가졌던 소현세자가 임금이 됐다면 조선중화론과 같은 자아도취적 정신세계에 몰입해 외부 세상과 단절되는 불행을 막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소현세자는 26세 때 1637년 심양으로 간 후 34세 때인 1645년 귀국했다. 그는 예수회 선교사이자 천문학자였던 아담 샬 신부에게서 천문, 수학, 지동설, 항해법, 화포제조법, 토목공사법 등 서양문물을 전수했다. 소현세자가 왕이 됐다면 청을 현실의 힘으로 인정하고 숭명사상 대신 서양의 새로운 사상과 과학기술로 잠자는 조선을 깨우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왕이 됐더라도 존주대의를 금과옥조처럼 떠받드는 신하와 양반 계층을 거슬러 조선 전체를 바꿨을 것이라는 기대는 침소봉대의 가능성이 있다고 경계한다. 소현세자와 함께 끌려가 같은 체험을 했던 봉림대군, 곧 효종은 그다지 개혁적 면모를 보이지 못했고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의 발호와 조선중화론 같은 퇴행적 흐름도 막아내지 못했다고 말한다.

저자는 청을 정벌하자는 효종의 북벌론에 대해서도 군비 및 왕권 강화가 목표였다고 본다. 청년기 8년을 청나라 심양에서 보낸 효종으로서는 국가의 위신이 군사력에서 나온다는 것을 절감했을 것이고, 효종실록에 북벌이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오직 연려실기술에 김자점이 옥사할 때 청에 조선의 북벌 계획을 고변(告變, 반역행위를 알림)했다고 나올 뿐이라는 것이다.

송시열은 주자학 절대주의자, 후기 조선의 사상 규정, 극단적 당파성도 부정적 유산

송시열(1607~1689)에 대한 평가는 주목할 만하다. 그는 조선 후기 주자학과 노론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인조, 효종, 현종, 숙종에 이르기까지 56년간 관직 또는 산림(山林, 향촌에서 벼슬을 하지 않고 지내는 선비)으로 있으면서 당대의 사상을 규정하고 정치판을 좌우해 추앙을 받았다. 저자는 주자를 제쳐 놓고 인조 이후 정치와 사상사를 논할 수 없는 것은 그에게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중국 송나라의 주자가 공자맹자의 도통을 이은 성인이라며 주자를 벗어난 일체의 주장을 용납하지 않았다. 존주대의는 그의 정치적 소신이었다. 주자학 절대주의자로서 그는 주자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오랑캐가 됐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더욱이 그는 극단적인 당파성으로 부정적인 유산을 많이 남겼다.

예송논쟁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된 당파 싸움에서 ‘걸출한 투사’인 송시열은 노론의 중심축이 됐고 다른 정파는 주변에 기생하거나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찍혀 불명예스럽게 소멸됐다. 삼학사의 공적이 재평가되고 공인된 데는 송시열의 공로가 절대적이었다. 그는 삼학사의 절의를 부각하기 위해 주화를 외친 최명길을 천하의 비열한(卑劣漢)으로 전락시켜 조선후기 300년 이상 폄하되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동지는 절의를 공유한 자, 적은 절의를 잃은 자'로 몰아갔다. 그는 ‘삼학사전(三學士傳)’에서 “내가 다투는 것은 오직 대의일 뿐 승패존망 따위는 논할 바가 아니다”라고 했다. 이로써 김상헌이나 정온을 비롯한 척화파들이 “나라가 망할지언정 도리를 잃으면 안 된다”라고 한 주장의 정당성을 후대에서 확고히 인증했다.

국가보다 유교 중요시, 조선말 위정척사 운동에서도 확인

주자학 절대주의는 조선 말기에까지 이른다. 위정척사(衛正斥邪, 바른 것, 즉 성리학과 성리학적 질서를 지키고, 사악한 것, 즉 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배척함)운동의 중심에 섰던 이항로(1792~1868)는 “학자가 주자를 종주로 삼지 않으면 공자의 문정에 들어갈 수 없으며, 송자(송시열)를 현창하지 않으면 주자학문의 통서(統緖, 계통)를 접할 수 없다”, “오늘날 우리의 책무는 유교 성쇠에 있고 국가의 존망에 이르러는 오히려 두 번째 일에 속한다”다고 말해 송시열로부터 200년이 흐른 뒤에도 국가보다 유교를 더 중요시한다는 것을 확인시켰다.

저자는 인조라는 호칭도 어처구니없다고 말한다. 나라를 창업하거나 중흥하는 등 공이 있는 임금을 조(祖)라 하고 덕이 있는 임금을 종(宗)이라 하는데, 인조의 공은 조종(祖宗)을 빛내고 덕은 온누리에 미쳤으므로 조(祖)라고 하는 것이 고례에 부합하고 어질 인(仁)을 써서 인조로 정하자는 것이 대신들의 의견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병자호란을 불러들이고 아들, 며느리, 손자를 죽음으로 몰고간 왕을 인조라한 것은 조상들이 후손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블랙 코미디라고 했다.

내 안의 송시열 성찰해 상대방 단죄하기보다 상생의 교훈 새겨야

저자는 마지막으로 정적을 사문난적으로 몰고가야 끝을 보았던 조선의 사대부들이 과연 정의를 실현했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역사학계는 물론 우리 사회가 최명길과 김상헌, 송시열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내려야 한다고 말한다. ‘인조의 나라’가 요즘의 현실을 진단하고 바로잡는 데 그 단초가 되기를 바란다. 그는 진영 논리에 빠져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고 단죄하는 요즘 정치권의 모습은 조선 후기의 당파싸움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지나치게 대의명분과 적폐청산에 매달리는 모습에선 허망하기 짝이 없는 절의를 내세웠던 김상헌을 비롯한 척화파를 연상하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불편하더라도 내 안의 송시열의 실체를 들여다 볼 수 있어야 상생과 공존이 가능하고 조선의 잘못된 유산을 극복해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고 강조한다.

 황진선

 오피니언타임스 공동대표

 전 가톨릭언론인협의회 회장

 전 서울신문 사회부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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