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의 프리라이팅]

[청년칼럼=앤디]

시작은 창대하나 그 끝은 미약한,

초반에 힘을 다 써서 언제나 뒷심 부족인.

고질적으로 매듭짓기에 취약한 나는 크고 작은 중도하차의 역사들을 갖고 있다. 그중에는 언젠가 꼭 다시 시작해야지 하는 것들도 있고, 한 걸음 디뎌본 걸로 충분히 아름다웠다 하는 것들도 있다.

수많은 중도하차들의 역사들 중 요즘 계속 내 머릿속을 떠다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한국방송작가협회 교육원의 드라마 과정 기초반을 미수료한 것이다. 당시 나는 10년의 직장생활 중 절반의 세월이 막 지나있을 때였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항상 뭔가를 끄적였고,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참 좋아했다. 새로운 무언가를 배우고 싶다는 바람만 갖고 있었던 어느 날, 글쓰기를 좋아하는 내가 정작 작법에 대해서 배워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픽사베이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수십 번의 검색과 비교 끝에 듣기로 결정한 수업이 바로 한국방송작가협회 교육원의 드라마 과정이었다. 막상 수강신청을 하고 나니 드라마의 열혈 시청자로서 어떤 사람들이 드라마를 쓰는 건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종국에 드라마를 쓰진 못해도 작법 수업이니까 향후 나의 글쓰기에 어떻게든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커져갔다.

그런데 이 수업은 신청만으로 수강이 허락되진 않았고 서류와 면접심사가 있었다. 면접 일정이 잡히고 주말에 여의도에 가서 왜 수업을 듣고 싶은지와 몇 가지 질문에 답하는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결과 통보를 받았다.

어쨌든 심사와 합격이라는 단계를 밟고 나자 첫 수업 때의 나는 그야말로 의욕 만땅의 열혈 수강생 모드가 되었다. 드라마도 잘 모르고 작법도 모르는 나니까 이 기초반에서 기역니은부터 차근차근 배워나가야지 하는 그런 마음이었다. 그런데 첫 수업부터 우리 반 선생님은 이런 나의 기대와 환상을 무참히 깨부수셨다. 선생님의 교육 방침은 충분히 이해되었으나, 그것을 따라가기엔 내 수준이 너무 미천했다. 나의 우려대로 선생님은 자세한 이론 설명 없이 첫 수업부터 과제를 던지셨다. 그 과제는 자유 주제로 각자 자기가 쓰고 싶은 시퀀스 하나를 써오는 것이었다.

ㅡ 시, 시시... 시퀀스?

그래도 신(scene)이라는 말은 들어봤는데 시퀀스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난생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과제 자체의 부담보다 과제가 무슨 뜻인지조차 모르는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인터넷을 쥐 잡듯 뒤졌지만 시퀀스에 대해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과제를 해내기 위해 시퀀스라는 개념을 잡으려고 주말에 도서관까지 가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너무 절망적이었다.

결국 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시퀀스라는 개념을 모른 채로 시퀀스 하나를 써서 냈다. 그다음 수업에 선생님이 직접 과제에 대한 피드백을 주신다고 했다.

시험을 망친 걸 뻔히 알면서 내 점수를 공개적으로 들어야 한다는 것은 상당히 마음 쫄리는 일이었는데 어김없이 다음 수업 날이 되었다. 한 명 한 명 이름이 호명되고 우리 반 전체 글에 대한 선생님의 평가가 이어졌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고, 나는 내 과제에 대해 '드라마 대본의 형식을 파괴한 줄글도 문제지만 글에 허세가 있다'는 혹평을 들었다. 예상은 했지만 선생님의 훅 들어온 평가에 얼굴은 화끈거렸고 찔린 마음은 아팠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는 억울하단 생각도 들었다. 시퀀스에 대한 설명을 조금이라도 해주셨다면, 이런 것이 시퀀스다라고 어떤 예시 하나만 들어주셨다면 비슷하게 흉내까지는 낼 수 있었을 텐데. 천재적인 재능과 특출 난 감은 없어도 성실히 하는 것에서는 자신 있는 나인데.

결과적으로 나는 그때 (그 혹평 때문이 아니라) 매 수업마다 주어지는 과제의 양과 일을 도저히 병행할 수 없어 중도하차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절대적인 시간 부족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와 생각해보니 그때의 나는 글을 쓰는 것만 좋아했지, 정작 쓰고 싶었던 것이 없었던 시기였던 것 같다. 하고 싶은 말이 없는데 억지로 무엇을 쓸려고 들었으니 시퀀스가 아닌 다른 글이었어도 허세만이 있었을 것이다. 수업 방식은 나와 맞지 않았어도 선생님의 평가는 정확했고, 역시 스승님은 스승님이었다.

요즘 나는 사실 어떤 글 하나를 구상 중이다. 출퇴근을 하는 지하철 안에서, 무언가를 읽고 멍 때리는 집안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시퀀스를 만들어냈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한다.

누군가에게 이게 시퀀스야~라고 정의는 못 내려줘도 적어도 감은 잡은 기분이 든다.

비록 그때 그 수업은 미수료로 끝이 났지만, 4년이란 세월 동안 내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시퀀스와 허세 있는 글은 내 중도하차의 역사에서 빠져야 할 운명이었나 보다.

보태기) 선생님은 드라마를 쓰려고 드라마 작가 수업을 들으러 왔던 사람들 중 대부분이 결국 드라마 시청자로 돌아간다는 의미심장한 말도 해주셨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종영한 '부부의 세계' 열혈 시청자 중 한 사람으로서, 오늘이 금요일이란 사실이 너무도 헛헛하다.

 

    앤디

    글을 쓰는 순간 자유롭습니다. 그래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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