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칼럼=우달]

얼굴을 마주한 지 1분도 채 되지 않은 낯선 이에게서 ‘당신은 과연 착한 사람입니까?’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무어라 답할 것인가.

이 무례하기 짝이 없는 물음에 곧장 답할 수 있다면, 당신은 어디에서든 혼자서도 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당신이 실제로 착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차치해두고 말이다. 때로 단정(斷定)은 삶의 큰 원동력이 된다.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에는 ‘착한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이냐’ 와 같은 반발심이 들거나 첫 만남에 애매모호한 질문을 던지는 상대에게 화가 나기 마련이다. 그 어느 쪽이 됐든 내 심리를 떠보는 듯한 상대의 의중이 마냥 좋게 보이진 않는다.

위와 같은 직접적인 질문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이는 드물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처음 마주하는 상대가 비교적 착한 사람이길 기대한다. 어딘지 모르게 다름에 대해 포용적일 것 같고, 잠깐 대화를 나누더라도 꽤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물론 이 두 가지는 내가 ‘착한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이고 그런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다. 이처럼 누구에게나 ‘착한 사람’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구체적인 인물상이 있다.

픽사베이

그러나 우리는 마냥 착하기만 한 인물을 좋아하진 않는 이중성도 갖고 있다. 흔히 ‘호구’라고 불리는 인물을 보며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는 관계에서는 이 ‘호구’가 나쁠 것도 없겠으나, 가까운 주변인이 이러한 부류라면 정말 골치 아픈 일이 생긴다. 관계가 가까울수록 더욱 골치가 아프다. 이들은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에 매번 휘말리거나, 인간관계에서 늘 손해를 보는 듯한 인상을 주며 주위를 답답하게 만든다. 번번이 위기에서 꺼내준 다음,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한들 그 순간일 뿐이다. 진정한 ‘호구’는 돌아서면 다르지 않은 난관에 또 봉착해 있다.

이즈음 해서 이실직고를 하자면 내가 바로 그 호구 중의 하나다. 비록 10점짜리 최우수 호구는 아니지만 7점 정도는 되는 준수한 호구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든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든, 나는 상대가 분명한 ‘No’ 사인을 보내기 전까지는 일단 잘해주고 본다. 식사를 같이하는 사이라면 일부러 대접을 하고, 일로 만난 사이라면 필요 이상의 업무를 돕기도 한다. ‘상대도 나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은 채 이같은 ‘호구짓’을 반복한다. 그러나 좋은 관계는 호구짓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는 것을 최근에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호구짓은 그저 호구짓일 뿐이었다. 그렇다 해서 내가 완전히 호구에서 벗어났다는 이야기도 아니지만.

한때 우수한 호구였던 입장에서 ‘호구들은 왜 호구짓을 할까’라는 난제를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정도로 구분할 수 있었다.

첫째 호구들은 좋은 관계를 선망하지만 그 방법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활한 인간관계를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상대의 감정에 면밀히 공감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호구들은 그러질 못한다. 사람마다 가진 감수성은 제각각이어서 같은 상황에서도 느끼는 감정은 다르기 마련이다. 따라서 처음 관계를 형성할 때에는 상대를 알아가기 위한 여러 시행착오가 필요하다. 하지만 호구들은 이 과정을 견디지 못해 한다. 시행착오를 겪다가 혹여나 상대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남길까 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호구들은 내가 받으면 좋아할 만한 행동을 무리해서 시도한다. 자기 위주의, 지극히 유아적인 행동이다.

둘째는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지나친 갈망 때문이다. 대체로 호구들은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고 이해할 수 있는 이상(理想)을 꿈꾼다. 이 또한 상대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수반되는 부담을 회피하려는 변명일지도 모르나, 개중에는 종교에 심취하듯 진정으로 이상사회를 꿈꾸는 사람들도 있다. 공상과학 영화에서처럼 전 세계 인구가 하나의 메인 시스템으로 의식을 공유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더라도, 이들의 그러한 바람만큼은 한 번쯤 눈여겨볼 만하다. 아무리 터무니없어 보이는 이야기일지언정 그 바람에 담긴 진의만큼은 순수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내가 호구여서 하는 소리다.

그럼에도 호구짓은 호구짓일 뿐이고, 분명히 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꽤 가까운 데 있다. ‘내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 괜찮아’라는 말은 저 멀리 산속에나 들어가서 하길 바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곁에는 내가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호구짓을 자처하는 동안 나 대신 슬퍼하고 가슴 아파하고 있을 소중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가족이 됐든 연인이 됐든 그 누가 됐든, 지금 내 곁에 존재하고 있는 이들을 괴롭게 할 만큼 이 새로운 인연이 과연 가치가 있는가에 대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호구들은 다시 한번 돌아보길 바란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어서는 안 되는 법이니 말이다.

 우달

우리가 자칫 흘려보낸 것들에 대해 쓰겠습니다.
그 누구도 스스로 모르는 걸 사랑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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