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미의 집에서 거리에서]

[논객칼럼=신세미]

언젠가 현관 문열쇠의 비밀번호가 긴가민가했을 때 머리 속이 아득했다. 너무도 친숙한 사람 이름이며 특정 장소와 용어를 한때 잠깐 깜빡하는 정도를 넘어 중요한 약속을 완전히 잊을 때는 황당하면서 마음이 무겁다. 기억력 감퇴를 넘어 질병 수준의 건망증인가 싶으면서 혹시나 치매의 초기 단계는 아닌지 걱정스럽기까지 하다.

얼마 전 휴대폰 일정표에도 기록한 점심 약속을 전날까지 의식했으나 정작 당일에 잊어버린 당혹스러운 경험을 했다. 그날 집에서 느긋하게 있다가 상대방이 오전 중에 확인 전화를 주었기에 부랴부랴 약속 장소로 달려가 간신히 결례를 면한 뒤로 하루에도 여러 번 일정표를 챙겨보고 있다. 최근에는 집을 나설 때마다 마스크를 깜빡해 집으로 되돌아가는 일이 반복되다보니 가방에 여벌의 마스크를 챙겨둔다.

이즈음 어딜 가도 건망증과 관련된 화제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깜빡깜빡 증세에 공감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또래들 모임에선 나이와 더불어 기억력 감소와 집중력 저하를 호소하며 “내 기억을, 나를 믿을 수가 없다”, “내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조차 자신있게 말하기가 두렵다”고 털어놓는다. 중장년 이상 뿐 아니라 젊은 층도 건망증에 따른 마음의 불편함과 곤혹스러운 경험을 하소연한다.

무언가 검색하려고 휴대폰을 꺼내고선 문자나 카톡을 확인하다가 정작 검색하려던 사실조차 까먹는다. 어젯밤 재미있게 본 TV드라마의 제목, 주인공 이름이 머리에 빙빙 돌 뿐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무얼 찾으러 방에 들어섰다가 몇 발자국 옮기다 보면 아무 생각이 안나 그냥 방을 휙 둘러보곤 되돌아 나온다.

픽사베이

가스레인지 불에 냄비를 올려놓은 걸 잊어 아파트가 떠들썩하게 가스경보기가 울리는 소동을 경험한 뒤 가스 점화 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불이 꺼지는 가스자동차단기를 설치한다.

건망증에 얽힌 10인 10색의 사연을 접하다보면, 자식의 결혼식 날 이른 시간에 미장원에 들러 두세 시간 머리 퍼머 하던 어머니가 혼사를 깜빡해 결혼식장 아닌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는 유머를 지어낸 이야기라고 웃어넘기기가 어려울 정도다.

전문가들은 건망증이 신체 노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젊은 층에서도 심한 스트레스 등으로 뇌의 피로가 쌓이고 집중력이 떨어지면서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 너무도 많은 정보에 노출될 경우 뇌가 이를 감당하기 어려워 기억력이 떨어지기 쉽다는 것이다. 또한 건망증은 일시적으로 잊어버렸던 기억이 어느 순간 되살아나는 반면, 치매는 기억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는 뇌질환이라는 점에서 치매와 건망증은 상이하다고 한다.

가물거리는 기억력을 조금이라도 원활하게 되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뇌 건강을 위해 뇌를 ‘쉬게’ 또 ‘즐겁게’ 해주기, 즉 비우기와 채우기를 병행하라고 전문가와 선험자들은 조언한다. 너무도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잠시 뇌를 풀어주는 비우기와 흥미로운 관심사를 쫓아 무언가를 새롭게 익히는 채우기, 그 둘 사이의 적정한 조화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세계적 정보기술 회사인 구글 에릭 슈미트 회장은 “하루 한 시간이라도 휴대폰과 컴퓨터를 끄고 사랑하는 이의 눈을 보며 대화하라”고 ‘디지털 디톡스’를 강조한 바 있다. 언제 어디서든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접하고 있는 디지털 중독의 시대에 디지털 기기와 떨어져 있는 시간을 정해두는 것도 심신의 휴식을 위해 실천해봄직한 팁이라고 생각된다.

작고한 서정주 시인이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원고지에 세계 각지의 산 이름과 높이를 적어 두고 외운 것이 기억력 감퇴를 예방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시인의 고향인 전북 고창, 폐교된 봉암초교 선운분교를 개보수한 미당시문학관에는 시인의 육필 원고와 시 연구 논문 등을 비롯해 시인이 말년에 외운 1600여개의 산 이름 목록도 전시 중이다.

노년에 비슷한 고민과 나름의 처방을 하게 되는 것일까. 무료할 때면 고향마을 산중턱부터 아랫마을까지 가구별로 사람들 이름을 떠올리며 기억을 일깨우신다던 친정어머니는 요즘 틈틈이 시조를 외우신다. 시조를 읊다보면 시간도 잘 가고 머리도 맑아지는 기분이라고 하신다.

최근 한 모임에서 시를 비롯해 좋은 글을 번갈아 읽으며 낭독의 시간을 갖기 시작한 것도 느긋한 감성을 일깨우며 뇌와 마음의 건강을 다지기 위한 작은 시도다.

   신세미

전 문화일보 문화부장.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후 조선일보와  문화일보에서 기자로   35년여 미술 공연 여성 생활 등 문화 분야를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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