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서정의 글우물]

[청년칼럼=허서정]

“백만 년이나 죽지 않은 고양이가 있었습니다. 백만 번이나 죽고 백만 번이나 살았던 것이죠. 정말 멋진 얼룩 고양이였습니다. 백만 명의 사람이 그 고양이를 귀여워했고, 백만 명의 사람이 그 고양이가 죽었을 때 울었습니다. 고양이는 단 한 번도 울지 않았습니다.”

동화 《100만 번 산 고양이》는 이렇게 시작한다. 네버엔딩 코로나 여파로 우울하던 와중에 뜬금없이 이 책이 생각났다. 이유는 모르겠다. 어린 날 기억의 한 조각일 수도 있고 너무 별일 없이 사는 까닭에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다 떠올랐을 수도 있을테다. 어쨌든 계란 한 판을 채우기 일보 직전인 어른이, 십오 년 만에 그림책을 펼쳤단 소리다. 책장에 오래 묵은 것치곤 상태가 양호했다. 그때 그 시절 책값은 7,500원이었다.

사는 게 다 그렇지만 어떤 일이 일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백신이 개발되어도 완치란 불가능하고 변이는 계속될 것이며, 마스크는 여전히 불티나게 팔릴 것이다. 그런 마당에 백만 번을 다시 태어나다니 얼마나 놀라운가. 고양이는 환생할 때마다 다른 주인과 산다. 임금님, 뱃사공, 마술사, 도둑, 홀로된 할머니, 어린 여자애도 있었다. 공통점은 모두가 고양이를 사랑했고 그럼에도 고양이는 모두를 끔찍하리만치 싫어한다는 거였다.

픽사베이

고양이는 누구 소유도 아닌 도둑고양이로서의 자신을 가장 사랑했다. 그렇게 살다가 하얀 고양이를 만나 부부지약을 맺었다. 시간은 흐르고 할머니가 된 하얀 고양이가 세상을 떠나자 곁에서 백만 번이나 울다가 조용히 움직임을 멈추고는 두 번 다시 되살아나지 않았다.

책을 덮고 나서 왜 내가 이 이야기를 보고 싶었는지 알게 됐다. 삶이 권태로워서였다. 그럼 죽느냐? 그럴 용기는 없었다. 백만 번을 환생했지만 다시 태어나길 포기할 만큼 소중한 무언가를, 나도 찾고 싶었던 것 같다. 오늘은 그런 얘기를 해보려 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학교를 잘 안 갔다. 체험학습 신청서 한 장이면 따분한 학교 수업이 재미난 현장체험으로 탈바꿈했다. 엄마는 아직 어린 우리를 차에 태우고 전국을 누볐다. 우암 송시열 글씐바위 가는 길엔 큼지막한 돌들이 박혀 있었다. 아래를 굽어보면 시퍼런 물살이 바위에 부서졌다. 암각시문(巖刻詩文) 옆에서 비뚤배뚤한 글씨로 시를 쓰고 밤게 그림도 그렸다.

보성 녹차밭에 갔을 땐 사위가 온통 초록이었다. 까마득하게 뻗은 삼나무 옆으로 계곡물이 세차게 흘렀다. 차밭은 계단에 두르르 펼친 녹빛 융단을 닮았다. 끝없는 차밭 너머로 운무가 밀려와 숲을 가렸다. 바깥에 상을 차려 푸짐하게 구웠던 녹차 삼겹살이 생생하다. 아아, 돌아가고 싶어라.

서귀포였나 우도였나, 잠수함 유리창 너머로 본 제주 바닷속은 별천지였다. 산호 색이 맵시 있게 선명했다. 빨강 노랑 파랑 물고기들이 모여들었다가 민첩하게 흩어졌다. 기념촬영에 가장 예쁜 풍경을 담으려고 타이밍을 쟀었다. 주상절리와 용머리해안은 또 어떻고. 둘은 같은 바다면서도 달랐다. 깎아지른 화산암 기둥 밑으로 거센 물살과 흰 포말을 내려다 보면 오싹하고도 통쾌한 기분이 발끝까지 내달렸다.

담양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을 걸을 때는 비가 내렸다. 장대마냥 쭉쭉 뻗은 나무들은 계속 자라날 것 같았다.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를 양껏 들이마시며 도착한 죽녹원에서는 기막히게 맛있는 딸기주스를 팔았다. 최근에 찾아보니 옛 국도였던 이 가로수길에 입장료가 생겼단다. 안정적인 징수를 위해 소송까지 불사한 모양이었다. 떡갈비 정식과 대통밥도 많이 비싸졌을 것이다.

전남 여수 녹동항에서 배편을 잡으면 거문도에 갈 수 있다. 선실로 내려가지 않고 상갑판에 주저앉아 미친 듯이 휘날리는 머리칼을 부여잡으며 사진을 찍은 게 아마 열세 살 때였으리라. 남도기행! 소록도 내 국립소록도병원 앞에 ‘한센병은 낫는다’가 새겨진 천사상 모양의 구라탑(救癩塔)이 세워져 있다. 해남 우항리 공룡알 해변에선 박물관보다도 돌 줍기가 먼저였다. 돌들은 정말이지 공룡알처럼 길죽했고 맨질거렸다. 남도 씻김굿을 구경하고 집으로 돌아왔다가, 십 년이 훌쩍 지나 다시 남해로 떠났다. 목적지는 금산 보리암이었다. 저녁나절에는 주법당 마루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향냄새가 은은하게 떠돌고 풍경은 이따금 맑은 소리로 울었다. 공양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풍경, 목탁소리 들으며 새벽예불을 드리고 밖으로 나와 안개에 싸인 아침해를 보는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런 게 있다.

자, 이것은 여행기인가? 그렇다. 이제는 맘 놓고 즐길 수 없게 된 여행의 기록이다. 코로나 시대엔 마스크를 덧씌워야 할 그리운 장면이다. 2020년인 지금 예전 발자취를 되짚는다 해도 십여 년 전 그곳이 그곳일 리 없다. 모든 순간은 그때만 거기 있다.

백만 번 산 고양이에게 영생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백만 년 고독과 일 년간의 행복이라면. 사랑하는 이와 서로 다른 시간을 걷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니 얼마나 오래 사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인생(人生)이 속칭 ‘아홉 개의 목숨을 가진’ 묘생과 달리 한 번뿐인지라 죽기 전까지 삶을 충실하게 채우는 것이 지상 과제다.

인간에게 백만 년 수명이 주어지면 그걸 오백만 년으로 연장하는 기술이 1조 5000억 원에 거래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조물주는 사람 목숨을 하나만 주었다.

허서정

살면서 잃어버린 것들을 되새기고자 펜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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