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서로 다른 기억으로 살아간다

[ 오피니언타임스=하정훈]  아버지 생신을 맞아 고향에 내려갔다. 결혼하기 전엔 아버지 생신이라고 서울에서 고향인 여수로 굳이 내려간 적은 없었다. 약간의 용돈을 계좌이체하고 가족 단체 카톡창에 아들로서의 도리적인 글을 남겨 좋은 아들로서 부모님에게 잘하는 아들로 스스로 믿고 지내왔다.

< 우리는 각자의 상처를 가져....>

결혼을 하고 나서 아내가 생기고 나서 아버지, 어머니 생신 때 거의 매번 내려가게 되었다. 뭔가 분위기가 바뀌었다. 부모님은 며느리가 생긴 이후로, 뭔가 더 행복한 가족의 모습을 꾸미시는 듯 했다. 달라진 분위기는 분명했다. 처음엔 그러려니 했으나, 안하던 것을 하는 요즘은 뭔가 어색하다. 분명 효자는 아닌게다. 그렇지만 그렇게 된 이유도 분명할 터이다.

  고향에 도착해 우리 가족은 계곡으로 놀러 갔다. 본지 거의 1년이 넘은 남동생을 불러, 온가족이 오랫만에 회를 먹고, 술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사진=픽사베이

 작년에 환갑을 넘기신 아버지를 옆에서 바라보니 아버지는 온통 주식에 신경이 가 있었다. 주식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아버지는 주식을 도박의 개념으로 하는 듯 했다. 주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며느리를 붙잡고 주식 이야기만 온통 늘어놓는데, 답답해져 왔다. 좋은 날, 더 좋은 이야기를 할수도 있을텐데... 그래봐야 20년 주식해서 본전도 못딴 아버지였다. 정말 주식으로 큰돈을 벌 수 있다고 믿는 걸까?

   자식에 고해성사 하시는 아버지

술을 먹다보니 예전 이야기들이 나왔다.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우리 아들들에게 미안하다고 고해성사를 한다. 어머니는 아버지랑 재혼을 하셨는데, 처음 나와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이렇게 아들에게 무심한 아버지가 다있나 나에 대한 연민이 들었다고 했다. 정작 그런 이야기를 어머니 입으로 들으니, 어머니가 내가 기억하는 유년 시절과 정말 다르게 생각하구나 생각했다. 난 어머니가 싫었다. 무서웠다. 어린 나를 학대했다. 정작 어머니는 그 사실을 잘 기억 못하는 것 같았다. 우린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같다.

저녁은 식당에 가서 소고기를 먹었다. 남동생이 고기를 굽더니 내게 소고기 한점을 무심히 올려주었다. 아무 생각 없이 올려준 것일텐데 뭉클했다. 어색해서 더 좋았던 것일 수도 있다. 남동생이랑은 8살 차이가 나는데 어느 시점부턴가 굉장히 어색한 사이가 되었다. 명절에 한 두마디씩 정도만 하기에 어떠한 이유 때문인지 모르지만 어색해져 버렸다. 아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동생에게 그토록 관심없는 내가 이유일 수 있겠다.

아내가 저녁을 먹고 나서 남동생과 2차를 가자고 했다. 나도 동생과 너무 어색하고 아내와도 몇마디 나눠본 적 없는 동생이기에 조금 친해지고 싶었다. 술이 나오기 전엔 정말 어색해서 점원에게 빨리 술을 달라고 재촉했다. 한 두잔을 마시고 동생의 말을, 동생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좋은 이야기들, 농담을 주고받는 이야기들, 동생의 여자 이야기들을 술자리에서 나누고 싶었다.

사진=픽사베이

        동생과 나는 아버지에 '디스'

그런데 동생의 주된 이야기는 아버지에 대한 '디스'부정적)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디스했다. 그리고 나에 대한 디스도 더불어 했다. 그러니까 술자리는 동생의 디스전이었다. 아버지는 우리가 오랫만에 함께 술을 먹는다고 보기 좋은 모습이라고 흐뭇해했다. 그런데 이야기는 전혀 즐겁지도 유쾌하지도 않았다. 처음엔 동생이 이해가 안되다가도, 화가 조금씩 나기도 했고, 그럼에도 처음 늘어놓는 동생의 이야기들을 동생의 입장에서 이해해보려 노력도 했다. 이야기를 듣자니 동생은 아버지에 대한, 나에 대한 상처가 많은 듯 보였다. 아버지의 모든 모습은 가식이고, 허영이라고 했고, 형인 나는 언젠가 정말 때릴지도 몰랐다고 했다. 나는 동생에게 미안하다고 이야기했고, “ 그래도 아버지는 너 생각 많이 한다 ”는 힘없는 말을 동생에게 말했다.

동생이 많이 취했기에 자리를 얼른 수습하고 집으로 보냈다. 아내는 이 모든 과정을 다 보았다. 기분이 안좋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결론은 아버지와 내 잘못인 듯 했다. 동생은 이야기 도중 아버지가 자기에게 했던 상처의 말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고, 전혀 잊지 않고 있었다. 결혼도 하기 싫다고 했다. 도대체 아버지랑 어떤 시간을 보낸 걸까? 나 또한 23살에 군대를 제대하고 서울로 상경했다. 힘든 타지생활이었지만 버틸 수 있었던 건 뭐였을까 생각해보면 아버지 밑에서 같이 지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여수, 서울 거리만큼 가족과 심리적 거리도 두고 지내고 있다. 그래서 그나마 평화로운 모습으로 지내고 있는 듯하다. 지금의 586세대의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 세대일텐데,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전형의 모습으로 가정을 이끌었다. 아내를 때리고, 자식에게 폭언하고, 주눅 들게 하고, 그럼에도 자식이 강하게 자라길 바라고, 해주는 건 많이 없고, 기대하는 건 많고, 아버지는 너가 강하게 자랐으면 좋겠다고 자주 이야기했으나, 강하게 자라는 것과 자식에게 무심하게, 모질게 구는 것의 차이를 아버지는 몰랐다.

사진=픽사베이

   아버지를 사랑했지만.....

처음하는 아버지였고, 돈만 벌줄만 알았지 정말로 아버지로서 무식했다. 나 또한 그런 아버지 밑에서 아버지처럼 될 가능성이 무척 컸다. 아버지를 사랑했지만, 부정했다. 그나마 아버지를 부정했기에 아버지의 안좋은 모습을 닮진 않게 된듯하다. 아버지와 많이 싸웠다. 아버지의 기대를 배반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아버지와의 불화 속에 지금의 성인으로서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아버지는 나와 동생이 이렇게 아버지를 생각하는 줄 전혀 모르실게다. 어머니 또한 내가 가진 학대에 대한 상처를 전혀 알고 있지 못할 것이다. 동생의 아버지와 나에 대한 기억, 어머니에 대한 나의 기억. 결코 사라지지 않을 기억들이고, 가까워지기 어려운 가족의 아픈 상처들이었다.

 하정훈

 그냥 아재는 거부합니다.

 낭만을 떠올리는 아재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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