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현의 사소한 시선]

  20여년 전의 발표가 아직도 머릿속을 맴도는 이유

  [오피니언타임스=양재현]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었다. 학교 선생님께서 숙제를 내주셨다. 한국전쟁에 대해 집에서 조사해온 뒤 발표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 시절의 나는 숙제하는 것은 정말 싫어했다. 결국 숙제 검사의 날은 다가왔고, 그때까지도 나는 아무런 조사도 하지 않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던가. 그날따라 선생님은 나를 가장 먼저 지목했고, 나는 꼼짝없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한국전쟁에 대해 발표를 해야만 했다. 숙제를 했다는 티를 내기 위해선 뭐라도 말을 해야 했던 상황이었다.

그때, 상상도 못했던 기적이 일어났다. 할아버지가 옛날이야기처럼 내게 들려주셨던 경험담이 불현듯 떠올랐던 것이다. 그 이야기는 어린 나의 기억 속에서도 매우 임팩트가 있었다. 마을 어귀에 있는 교회에서 사람들이 총격을 당했다는 이야기었으니 말이다.

‘이거다!’ 싶었던 나는 머릿속의 기억을 더듬어, 할아버지의 경험담을 신나게 풀어나갔다. 덕분에 발표도 술술 진행되어 잘 마무리되었고, 반의 분위기도 좋았다. 듣고 있던 선생님께서도 나에게 잘했다며 칭찬을 해주셨으니 말이다.

사진=픽사베이

그리고 나는 이 사건을 새까맣게 잊고 말았다. 이 사건이 다시 떠올랐던 것은 성인이 된 후의 이야기였다. 어른이 된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입장이 되었고, 때마침 아이들이 한국전쟁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아이들에게 가르쳐 줄 한국전쟁에 대한 지식을 하나하나 점검해가던 중, 어렸을 적 할아버지가 알려주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정말 중요한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바로 할아버지와 내가 살았던 곳은 제주도였고, 제주도에는 북한군이 들어온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4.3사건  발표를 모른척 해주신 선생님의 '배려'

이제 와 생각해보면, 할아버지가 나에게 들려줬던 이야기는 아마도 4.3 사건 이야기였던 듯 했다. 하지만 제주도가 겪었던 시련을 몰랐던 나는 총과 사람이 죽는 이야기만 가지고 그게 한국전쟁이겠거니 대충 생각해버렸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초등학교의 발표 시간까지 떠올랐고,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에 대해 발표하랬더니, 뜬금없이 4.3 사건을 자랑스럽게 발표하는 것을 보고, 선생님은 이 아이가 얼마나 한심했을까. 그런 날 보며 선생님은 얼마나 비웃었을까. 한동안 나는 그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수치심에 몸을 떨어야 했다.

    알면서도 굳이 모른 척해주던 어른을 생각하다

  그 수치스러웠던 기억이 훈훈한 기억으로 바뀐 것은, 그로부터 시간이 꽤 흐른 다음이었다. 나도 많은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그 아이들이 실수하는 모습, 거짓말 하는 모습, 얕은 수를 쓰는 모습, 틀린 지식을 늘어놓으며 아는 척 하는 모습을 다양하게 겪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과거의 기억은 나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날 얼마나 한심해하며 비웃었을까’ 하는 생각 대신, ‘그 자리에서 지적할 수도 있었는데, 모른 척 박수를 쳐주셨구나’ 하는 고마움이 점점 크게 다가왔던 것이다.

만약 그때, 선생님이 반 아이들의 앞에서 발표를 끝낸 내게 그건 한국전쟁 이야기가 아니라 4.3 사건에 대한 이야기라며 내 발표는 틀렸다고 지적했다면, 그 후의 나는 어떤 태도를 가지게 되었을까? 그 시절의 나를 떠올려본다면 울면서 자리에 앉았을 수도 있고, 아무렇치 않은 척 명랑하게 자리에 들어가서는 집에서 펑펑 울었을 수도 있다. 더불어 그 일은 아마도 반 친구들의 놀림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날의 ‘틀린 발표’는 내게 큰 트라우마로 남게 되지 않았을까?

  이제는 내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 아이들이 틀린 지식을 늘어놓을 때 내가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럴수록 그날 선생님이 내게 보여줬던 태도는 더 큰 교훈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아동에 대한 배려가 사라진 시대, 어른의 태도는 무엇일까?

  최근 우리 시대를 살펴보면 아이들에 대한 배려가 사라진 듯하다. 아이들에게 성인 수준의 도덕을 바라고, 아이들의 오류를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고 과도한 비난을 가하기도 한다. 더 큰 문제는, 아이들의 오류를 지적만 할 뿐, 그 이후 아이들의 성장에 대해서는 나몰라라 해버린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얼마든지 틀릴 수 있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겪는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이다. 중요한 것은 틀린 이후다. 주변인들의 반응에 따라 틀린 것을 인정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고, 틀리는 것을 강박적으로 무서워하게 될 수도 있으며, 틀리는 것이 두려워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릴 지도 모른다.

때로는 아이들에게 세세한 지식의 맞고 틀림보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태도를 길러주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이를 위해선 틀린 것은 성장 과정에서 차차 깨닫도록 잠시 미뤄두고, 남들 앞에 서 있는 그 자체를 먼저 칭찬해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들보다 인생을 몇 년 앞서 겪은 어른이 보여줘야 할 배려이다.  다행히도, 나는 그러한 배려를 가진 어른을 만났다. 그것이 큰 양분이 되어 성장할 수 있었다. 그래서 노력 중이다. 나 또한 그러한 어른이 되어, 내가 받은 배려를 물려주기 위해.

양재현

사소해 내놓지 못했던 시선.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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