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광해· 인조대의 중립외교 설계자-- 장만 장군 이야기

[ 이이첨과 장만-2]

어전에는 예조판서 이이첨이 대기하고 있었다. 광해가 어좌(御座) 앞으로 두 사람을 불러 앉혔다. 

“의견들을 나눠보시오.”

앞뒤 없이 왕이 이렇게 말하자 장만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얼른 감이 잡히지 않는 것이다.

“무슨 의견을 나누시라는 말씀이오니이까, 상감마마.”

“과인이 불렀다면, 정녕 짐작하지 못했단 말인가?”

네 죄를 네가 알렸다? 라는 식이니 장만은 의아스러웠다. 무안을 당한 기분이었지만 장만이 정중하게 아뢰었다.

삽화 =김혜선

“신은 아둔하게도 마마의 심중을 간파하지 못했나이다. 가납(嘉納)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면 과인이 말하겠소. 지금까지 예판(예조판서)과 우리 군사의 중국 파병 문제를 가지고 논의하고 있었소. 파병을 해야 한다는 예판의 논지와 파병을 재고해야 한다는 장만 장군의 의견이 충돌하는즉, 두 의견을 듣고 결정할까 하오.”  그제서야 장만은 긴장을 풀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소신이 서있었다.

“말씀 올릴 기회를 주셔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장만이 두 손을 모아 읍했다. 이이첨이 싸늘한 시선으로 장만을 살피고 있었다. 사뭇 경계하는 눈치였다. 대리석같이 깎아놓은 듯한 이이첨의 얼굴은 표정이 사뭇 서릿발 같아서 언제 보아도 몸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저렇게 잘 생긴 사람이 왜 성격이 얼음장처럼 차가울까. 장만은 그의 미남형 얼굴에 탄복하면서도 하는 일이 냉혹해서 그를 보면 칼에 댄 듯한 섬뜩함을 느꼈다.

“마마, 굳이 낙서(洛西:장만 장수의 호) 장군의 말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까?”

이미 결정된 사항을 변경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이첨은 그동안 왕 앞에서 자기 지론을 폈던 모양이다. 

광해는 때로 그에게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위세는 어느결에 왕권을 위협하는 듯했다. 그래서 왕은 그를 누를 수 있는 중재자를 찾고 있었다. 수용할 수 있는 안건이라도 밀리면 영이 서지 않을 뿐 아니라, 그나마 아직은 약한 권위다. 왕위를 물려받은 지 11년째지만 신하들이 쉽게 따르지 않고 있었다. 이이첨이 너무 커버렸으니 이이첨에게 줄을 서는 자는 있어도 왕에게는 쉽게 가까이 다가오려고 하지 않는다.

왕은 이런 때일수록 다른 중신으로 하여금 누르도록 해야 한다. 이이제이(以夷制夷) 방식이다. 그 사람이 장만이다. 원칙주의자에 논리에 물러섬이 없다.

이이첨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마마, 생각해보십시오. 명에 대한 사대는 우리 조선이 생존하는 정치의 기본 틀이고, 국정 지표입니다. 조선이 태평성대를 이끈 지난 200년의 역사도 대국을 부모국으로 모시고, 그 보호를 받은 산물입니다. 세종대왕 마마 대에서는 더욱 뚜렷했습니다. 세종대왕 마마는 명나라가 북원(北原) 정벌에 쓸 말을 요구해온 것보다 이천 마리가 더 많은 일만 마리를 바쳤습니다. 천인이 먹고 살기 위해 끄는 수레의 말까지 징발해 바쳤습니다. 사냥을 잘하는 조선의 매도 필수 조공품 중 하나였습니다. 이 매는 본시 포획하기가 까다로워서 이것을 잡는 것이 당시 조선 관료들의 주요 업무가 되었지요. 명 황제가 조선의 여인이 밤 행사에 독특한 맛을 풍긴다 하여 요구하기로, 전국의 여인들을 선발하여 공녀로 바쳤습니다. 세종 임금이 뭘 몰라서 그랬겠습니까? 대국의 우산 밑에 들어가는 사대 외교만이 우리 생존의 근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명나라가 구원병을 요청하는데, 외면해야 되겠습니까? 그것은 신하국으로서 불충입니다.”

그의 언설은 빈틈이 없었다. 선왕대의 예까지 드는 데야 반박할 논거가 없었다. 왕과 장만이 침묵을 지킨 것에 용기를 얻었던지 이이첨이 더욱 자신있게 말하였다.

“조선의 유생들이 한결같이 재조지은을 말합니다. 배운 바, 예법과 의리를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사대는 조선의 국정 철학이자 우리 삶의 좌표입니다. 마마를 왕위에 옹립한 세력이 또한 명나라 조정입니다. 선왕의 횡포를 막아주신 사사로운 관계에서도 은인국입니다. 그런데 파병하시는 것을 꺼려하시다니요.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옵니다. 일찍이 은혜를 모르는 자는 축생과 같다고 했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이이첨은 왕을 완전히 깔아뭉개는 태도였다. 장만은 이이첨이 너무도 커버렸다고 생각했다. 왕의 생각은 신중한데, 그것을 면전에서 까뒤집으려고 한다. 왕은 그래서 장만을 불렀던 것이다. 이이첨은 아무래도 장만이라야 상대할 수 있다.

-이놈이 항차 모반을 꿈꿀 놈이다.

광해는 정권을 잡는데 그의 신세를 지긴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큰 일을 낼 자라고 경계하였다. (금요일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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