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영화감독이자 배우인 우디 앨런(Woody Allen, 1935~ )이 1996년 발표한 로맨틱 코미디 뮤지컬 영화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 혹시 기억하시나요? 벌써 30년 전 영화네요. 영화 제목을 번역하면 ‘내가 너 좋아하는 거 다른 사람은 다 알아’라는 뜻이라고 당시 학생들이 제게 가르쳐줬답니다. 

뜬금없이 사랑 타령을 하게 된 이유는, 이제야 랑콤 립스틱보다 더 고운 빛깔로 물들어가는 블루베리 단풍 탓이 크지만, 뜻밖의 소소한 계기가 있었습니다. 실은 10월 초부터 오른쪽 팔꿈치에 염증이 심해지면서 오른팔 손목을 잘 못 쓰는 불상사가 일어났답니다. 지금도 어설프기 짝이 없는 농부가 소나무 밭에 들어가 웃자란 뽕나무를 자르다 그만, 안 쓰던 근육을 과도하게 쓴 탓에 탈이 나고 말았던 겁니다. 

오른쪽 팔이 저려오기 시작하다 손목에 힘을 줄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겁이 덜컥 나 조치원 읍내의 신경과를 찾았지요. 조치원에선 알아주는 명의(!)답게 아픈 부위는 물론 아픈 이유까지 족집게 도사처럼 맞히고는, “무조건 안 써야 낫는 병이니 농사일 집안일 모두 스톱하고 짜장면 시켜 먹으며 젓가락질만 하라”고 신신당부하는 겁니다. 당분간은 물리치료 열심히 받으면서요. 

첫날 물리치료실에 누워 찜질을 하고 있는데 바로 옆자리 칸막이 너머에서 할아버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오더라구요. 조금 후엔 휴대폰 스피커폰을 통해 할머니의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오구요. 두 분이 어찌나 정겹게 대화를 나누던지, 저도 모르게 귀를 쫑긋해가며 두 분의 이야길 엿듣게 되었습니다. 

물리치료실 @자료사진 연합뉴스
물리치료실 @자료사진 연합뉴스

“어제는 대봉(감)을 다 따버렸구먼. 그래서 그런가 어깻죽지가 쑤시네.” “대봉은 서리 맞은 후에 따야 진짜루 맛있는겨. 좀 더 있다 따지 그랬어? 나 불렀으면 얼푼 갔을 텐디.” “별일도 아닌데 뭘 부르고 그런댜. 대봉 잘 익은 걸루다가 조금 보내줄껴.”

“오늘은 어디가 아파서 물리치료를 받는겨?” “맨 거기지. 허리도 아프고 넓적다리도 아프고 등판도 아프고...” “우리 나이엔 뼈 부러지면 큰일이라는디, 칼슘은 챙겨먹는겨? 유튜브에서 봤는디 칼슘은 저녁에 먹어야 좋댜. 그나저나 초등학교 동창 모임이 내일이여 모레여?” “아 모레여.” “이번엔 어디서 하는디?” “서울 명동인가 어딘가에서 한다는구먼.” “여자 동창도 오는겨?” “그럼 오지.” “몇 명이나 오는디?” “한 서넛 오지.” “그중 특별히 마음에 드는 여자 친구는 없는겨?” “뭔 소리 하는겨? 싱겁기는...” 

그 후로도 두 분의 대화는 할아버지의 물리치료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걸 보니 분명 부부는 아닐 테고, 도대체 무슨 관계일까 유추해보니, 두 분은 한동네 살던 오랜 친구인데, 할아버지는 지금도 조치원 부근에서 벼농사 짓고 있고 할머니는 결혼해서 천안 인근으로 떠난 듯했습니다. 지금은 두 분 다 배우자 없이 홀로 사시는 듯했구요. 얼마나 편안한 사이인지 모지리 아들들과 약빠른 며느리들 흉도 함께 보고, 어수룩한 사위들 칭찬도 함께 나누더라구요. 

예전 ‘썸 탄다’는 말이 유행할 때 학생들에게 썸과 사랑의 차이가 무언지 물었던 기억이 납니다. 썸은 사랑하기 전(前) 단계 쯤 되는데, 굳이 구분하자면 만나면 그저 부담 없이 좋은 사람, 하지만 서로에게 책임은 없는 관계가 썸이라고 하더라구요. 

미국에서 이혼율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시기에 백년해로하는 부부를 찾아 ‘왜 이혼하지 않는지’를 탐색한 연구가 발표된 적이 있었습니다. 금실 좋은 부부들이 해로의 비결이라며 단골로 언급했던 단어는 배우자를 향한 신뢰(와 존경), 함께 있을 때 나누는 위로(힐링), 마음껏 의지할 수 있음 등이었다고 합니다. 사랑을 지목한 부부는 가뭄에 콩 나듯 했다니, '사랑? 그까이꺼!'가 맞는 것도 같습니다.

‘이제 와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마는’ 최백호의 허스키 보이스에 가슴이 쿵 내려앉기도 하지만, 종종 배신의 쓰라림을 안겨주는 속절없는 사랑보다는, 썸 타기 딱 좋은 나이라 그런가, 오랜 세월을 함께해온 할아버지 할머니의 살가운 우정이 내심 소중하게 다가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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