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 핸드폰에 불필요하고도 불쾌한 사진들이 쌓이고 있다.

아파트 공용 계단에 짐을 적치하고 있는 아파트 입주민 때문이다. 그는 기내용 캐리어 두 개가 거뜬히 들어갈만한 대용량 박스 3개를 꽤 오래전부터 쌓아두었다. (시간이 많이 지나) 최초 시점은 가물가물하지만 확실한 건 이 만행의 지속이 반년은 족히 돼간다는 것이다.

이사 들어오는 앞 뒤 며칠은 한창 짐 정리가 있을 수 있으니 언젠가 치우겠지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사실 그는 박스 외에도 동남아 휴양지에서 볼 법한 반원모양의 의자를 비상용 엘리베이터 앞에 방치하는 등 싸한 행동을 보이긴 했다. 다행스럽게 의자는 곧 사라졌지만, 계단의 천장까지 닿을 법한 대형 박스들은 몇 주간 공용계단 한 구석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었다.

한 아파트에 개인이 무단으로 쌓아둔 물건들@자료사진 연합뉴스
한 아파트에 개인이 무단으로 쌓아둔 물건들@자료사진 연합뉴스

위험하기도 하고, 공용 공간을 사적 창고로 이용하는 몰상식하고도 무식한 작태를 참을 수 없어서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했다. 통화하고 몇 분 후, 관리사무소로부터 피드백이 왔다. 짐의 주인을 찾았고, 그가 박스를 치울 시간을 조금만 달라고 사정하니 며칠만 양해부탁드린다는 말이었다. 아, 생각보다 비양심적인 인간은 아니구나 안심하면서 알았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그는 사정했다는 사람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그 뒤로도 몇 주, 아니 몇 달간 대형 짐들을 공용계단에 내깔겨 두었다. 죄 없는 관리사무소에 전화해서 매번 항의하는 것도 못할 짓이고, 너무 닦달하면 역효과가 날까 봐 짐이 그대로 있는 기간 대비 나의 전화 횟수는 정말 적은 편이다. (몇 달 뒤, 박스 1개는 치웠길래 그걸 보고 누그러진 탓도 있다)

그의 만행이 지속되고 얼마 뒤부터 현재까지 박스 사진을 찍는 것은 나의 일과가 되었다. 저에게 사진 보내주셨던가요?라는 관리사무소 직원의 한 마디 때문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좋게 말하면 치우겠지 하는 나이브한 기대가 있었기에 사진 찍을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 말에 아차 싶어 그 뒤부터 쭉 핸드폰에 박스 사진들이 쌓이고 있다.

달력이 한 장 남은 12월. 나는 (예전보다) 자주, 강력하게 관리사무소에 연락을 취하고 있다. 그 인간은 가만 내버려 두면 올해를 넘기는 것은 물론이고, 본인이 다른 곳으로 이사 가기 전까지 공용계단의 사적 창고화를 유지할 것 같다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 어제 관리사무소 직원과 통화한 것에 따르면, 그가 되려 공용계단에 짐 두는 게 뭐가 문제냐고 따져 물었다 한다.오다가다 오늘은 치웠으려나 하는 마음으로 덩그러니 놓여 있는 박스 사진들을 찍었던지라 그 말에 헛웃음이 났다.

잘못은 쟤가 했는데 왜 그 잘못의 입증 책임을 내가 지고, 내가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지? 왜 빌런들은 식상할 정도로 말과 행동이 적반하장적 세계관에 갇혀 있지?

요즘엔 워낙 무고도 많고 주장의 확실한 근거로 사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좋게 말하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 이토록 힘이 없구나 싶어 씁쓸했다. 관리사무소도 답이 없다 싶었는지 소방법 위반이라는 경고장을 다음 카드로 생각하고 있었다.

과연 이건 먹힐까 의문이긴 한데, 이런 종류의 인간이라면 본인의 행동이 금전적 손해로 이어질 때 돌변하는 빌런적 일관성이 분명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난 그 점에 기대를 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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