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를 주유하는 것도 모자라 세대를 넘나드는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옛날에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리지?"

"그 옛날에 어쩜 이렇게 열린 생각을 할 수 있지?"

쏟아지는 질문 공세에 대답할 길은 하나 밖에 없죠.

그들은 선구자였노라고-

시대를 앞서 간 예술혼을 불태웠노라고-

지난 6월 25일부터 8월 25일, 그러니까 내일까지 펼쳐지는 특별한 전시.

제가 사랑해 마지않는 국립중앙박물관의 <표암 강세황> 展 입니다.

사실 7월 초에 다녀왔는데 이제야 소개하는 사태가 벌어졌네요.

이건 강세황 님에 대한 예의가 아닌데- ㅠㅠ

그래도 꿋꿋하게 올립니다.

그저 제가 다녀온 것에 대한 기록 차원의 이기적인 마음으로- :)

 

국립중앙박물관 으뜸홀.

어떤 전시가 펼쳐지고 있는지 한눈에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는 무료 관람입니다.

또한 상설전시는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끊임없이 유물을 교체 전시하지요.

그래서 자주 가도 전혀 지겹지 않은 곳입니다.

역사는 그 어떤 학문과 논리보다 앞서는 궁극의 시작점이니까요.

여행도 그 나라의 역사 공부가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적어도 제 생각에는 말입니다. 

역사 이야기가 나오니 제가 또 급 흥분을 했는데,

어쨌든 무료 관람이라고 해서 이곳이 가볍거나 함부로 해서 되는 공간을 뜻하는 건 아닙니다.

혹자는 말하더군요.

국립이니까 당연히 무료여야 하는 게 아니냐고요.

하지만 세상에 당연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최소한의 매너를 지키며 관람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참!

국립중앙박물관 매점엔 껌을 팔지 않는다는 사실.

사람들이 바닥에 그냥 뱉는 사례가 많아서 아예 팔지 않아요.

씁쓸합니다.

 
 

1층 특별전시실에서 진행되고 있는 <표암 강세황> 展.

천부적인 재능과 열정이 가득한 시서화(詩書畵)는 물론,

해박한 지식과 안목을 바탕으로 비평가로서의 업적도 숱하게 남긴 강세황(1713-1791).

정말 모르는 게 없고 못하는 게 없었던 만능 엔터테이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죽하면 '18세기 예원의 총수'라 불릴까요. :)

 

옛 사람의 글과 그림을 본다는 것은 붓이 지나간 자리에 밴 역사도 함께 읽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 시대 상황을 알고 작가의 의도를 이해해야만 작품이 살아 움직이지요.

그래서 이런 전시를 관람할 땐 도록을 먼저 사서 보며 관람하거나

도슨트의 설명을 곁들일 필요가 있어요.

풍성한 시간이 될 테니까요. :)

 

전시 구성은 아주 깔끔합니다.

공기 접촉과 습도, 조도에 민감한 시서화 유물이다 보니 관람 환경도 쾌적하고요.

 
 

도슨트, "이 글씨, 어디서 많이 보셨죠? 누구의 글씨인가요?"

할아버지1, "추사 김정희 선생님 아니십니까!"

깜짝 놀랐어요.

당당하고 또렷한 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아직도 기억납니다.

김정희가 쓴 <삼세기영지가>.

할아버지 강백년(1603-1681), 아버지 강현(1650-1733)의 뒤를 이어 강세황까지

삼대가 연속으로 기로소에 입소하는 영광을 누린 가문에 대한

추사의 축하 메시지라고나 할까요.

 

기로소(耆老所)는 나이가 많은 문신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조선시대의 기구입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였죠.

70세 이상, 정2품 이상의 관료들만 자격이 주어졌어요.

일단 건강하게 장수해야 하고, 사회적 지위도 갖춰야 했죠.

이런 자격을 삼대에 걸쳐 가졌으니 분명 대단한 가문이라 할 수 있겠죠. :)

 

<지락와>(1761년, 강세황).

이곳은 현재 경기도 남양주에 자리한 해주 정씨의 종가입니다.

당시 강세황이 친구의 초청으로 정택조의 집인 '지락와'를 방문하고 그 일대를 그린 그림이지요.

 
 

<풍악장유첩> 중 <죽서루>(1788년, 강세황).

강세황이 76세의 나이에 관동지역을 유람하고 그린 죽서루.

강원도 삼척시에 있는 누각이지요.

오십천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자리 잡고 있는 죽서루의 풍경.

 

현재 죽서루의 모습.

변함이 없네요. :)

 

강세황이 화폭에 담는 소재는 그야말로 세상 모든 것이었어요.

봉숭아, 해당화 등 참신한 소재는 물론, 노란색이나 푸른색 등 감각적인 담채를 구사한 그의 작품들.

개구쟁이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재미있는 시도지요.

정말 타고난 재주꾼입니다. :)

 

 

 <여지>(18세기, 강세황).

강세황이 그림을 그리고, 허필이 평을 적은 작품.

 

그런데 이 그림 속 과일을 잘 보면 우리가 잘 아는 리치(Litchi)와 닮았습니다.

딱딱한 껍질을 까서 먹는 열대과일, 그 리치 말이예요.

그 시절에 리치가 있었다는 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D

 

누구의 작품인지 모르는 <눈 쌓인 대나무>.

하지만 이 그림을 보고 반한 강세황은 품평의 글을 남겼어요.

표암 강세황은 여러 사람들과 교유하고 그림을 감상하며 뛰어난 감식안을 키웠습니다.

그래서 많은 화가들의 작품에 화평을 남겼지요.

그저 주관적인 감상평을 넘어 조선 회화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 흐름을 엮어 내어

18세기 화단을 조망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림을 소장한 사람들은 그에게 그림을 보이고 화평을 받는 걸 영광으로 여겼죠.

 

<나비>(1782년, 김홍도).

김홍도가 38세에 그린 그림입니다.

강세황 왈,

"나비의 가루가 손에 묻을 듯하니,

인공이 자연의 조화를 그대로 재현한 것이

이런 경지에 이르렀단 말인가?

부채를 펼쳐 감상하고는 경탄하여 한마디 적는다."

그림과 글로써 김홍도와 강세황의 다재다능한 명성을

함께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

 
 

<십로도상첩>(1790년, 김홍도).

이 작품 역시 김홍도가 그리고 강세황이 썼습니다.

강세황 왈,

"공들이지 않고 그렸으나 본래의 면목을 잃지 않았으니

또한 화가로서 귀신같은 솜씨라고 할 수 있다."

 

<강세황 초상>(1781년, 한종유).

궁중화원 한종유가 부채에 그려 준 강세황의 69세 때 초상입니다.

이 그림에도 강세황의 마음이 담겼어요.

제법 비슷하게 그렸다고 하면서 손자 강이대에게 준다고 적었죠.

당시 강세황은 예원의 스타였을 겁니다.

지금으로 치면 연예인 사진을 넣어 파는 물건과 같다고나 할까요.

그렇게 생각하니 재미있네요. :)

 

<강세황 초상>(1783년, 이명기).

1783년, 71세가 된 강세황은 기로소에 들어갔습니다.

이를 기념하여 정조가 이명기에게 초상을 그리게 했지요.

실제로 이 그림을 보면 살결과 안면의 굴곡까지 세밀하게 표현되어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깜짝 놀라요.

당시 초상화로 유명했던 이명기의 솜씨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작품이죠.

 
 

<자화상>(1782년, 강세황).

70세 되던 해, 손수 자신의 모습을 그린 강세황의 자화상입니다.

위의 초상화와 비교하며 보는 재미도 쏠쏠하지요. :)

이번 전시는 강세황의 탄신 30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역동적인 생애와 품격 있는 예술 세계를 조명했습니다.

집안 대대로 전해 오는 유물들과 초상화, 산수화, 사군자도 등

그의 대표적인 작품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기회였고,

그의 감각적인 비평이 담긴 다른 화가들의 작품도 함께 감상할 수 있었죠.

다만 이 멋있는 전시를 저만 보고

이렇게 늦게 소개하는 만행을 저질러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_+
 


(글.사진 : 글쟁이 하품하다/http://www.writerh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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