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는 결국 네마조네스가 내야했다. 네마조네스는 유모리몬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네마조네스가 마지막 힘을 내기 시작했다. 사이베르 세상 모든 창에 ‘기억해, 우리들의 메모리’ 메시지를 띄웠다. 네마조네스는 유모리몬 제거보다 먼저 나쁜 메모리를 청소하는데 집중했다. 바퀴벌레가 습한 곳을 좋아하는 것처럼 유모리몬도 나쁜 기록에 의존하며 세력을 키워왔기 때문이다. 부키와 노타모레는 네마조네스에게서 진실의 페르푸메를 느낀다고 말해줬다. 그것은 사실 과장이었지만 네마조네스에게는 힘이 되어줬다. 어느 날 네마조네스는 신성한 나무의 위대한 원령의
그러나 우디의 꿈처럼, 나이테의 질문처럼 세상은 예상치 않은 방향으로 변해갔다. 사람들은 기억을 무서워했지만, 자신에 대한 신비스러운 태몽을 꾸고 자신을 품어준 엄마를 기억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빠가 무동 태워주고 귀를 잡아 서울 구경시켜준 기억도 부정할 수 있을까?다시 글을 쓰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페르푸메가 피었다. 지식인들은 ‘좋은 습관’이라는 캠페인 테마로 책 읽기와 노트하기를 권장하기 시작했다. 페르푸메가 더 세졌다. 문지는 기뻤다. 우디가 다시 노트를 하기 시작했다. 그림도 그렸다. 눈도 맑아졌다. 드디어 사막의 샘물이
표지에 거대한 나무가 뿌리에 별을 감싸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노트는 지금은 인도네시아에 있는 성식이 보낸 것이다. 문지는 한참동안 노트를 매만지다가 말없이 우디에게 건넸다. 우디는 흐린 눈을 비비더니 노트를 받아 표지를 넘겼다. 한 장, 두 장 넘기는 속도가 점점 늦어졌다. 눈을 또 비볐다. 노타모레가 노트에 페르푸메를 짙게 뿌렸던 것일까. 우디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우디는 문지를 쳐다보지 않은 채 중얼거리듯이 말했다.“엄마, 이상해. 내가 어젯밤 꾼 꿈에 나온 나무가 바로 이 나무 같아. 근데 여기 내 이야기가 있어.
그리고 세상은 5년 간 더 지움의 시간으로 흘러갔다. 역사는 그 시기를 ‘악몽의 델레테 5년’이라고 불렀다. 노타모레는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지 그래도 가끔 밝은 표정을 지었고 핀란드 자작나무 숲을 향해 미소를 지었지만 대부분의 요정들은 공포에 떨었다. 문지는 우디를 바라보면서 아들의 기억을 지켜주지 못하여 미안했다. 그래도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사막이 아름다운 건 깊은 어딘가에 샘물이 있기 때문이라고 여겼고, 신성한 힘을 가진 샘물이 세상을 구할 거라고 믿었다. 노트의 요정에게서 위대한 기억의 나무 이야기도 들었다. 그 분은
유모리몬이 극성을 떨수록 새하얀 도화지처럼 진실만 남고 모든 게 평등해질 줄 알았던 세상은 반대로 오만해지고 편협해졌다. 사람들은 이젠 판단 능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신기술이 좋은지 나쁜지도 몰랐다. 그것은 노타모레와 부키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페르푸메의 에너지도 최고로 약해졌던 시점과 거의 일치했다. 그 무렵부터 핀란드의 자작나무 숲도 말라가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나무를 자르지 않았지만 오히려 나무들이 고사했다. 노타모레와 부키가 애타게 기다리는 신목의 목소리는 여전히 들려오지 않았다. 이제는 7백년이 된
이제 부키와 노타모레도 방심할 수가 없었다. 이 속도와 기운이라면 곧 책과 노트 아날로그의 세상에도 침투해 들어올 게 분명했다. 아날로그와 사이베르는 쉽게 분리될 수 없을 정도로 연결되어 있다. 만일 유모리몬이 인간 세계로 온다면 그들의 침투대상은 책과 노트가 체계적으로 분류된 세계 최대 대도서관의 아카이브 망일 것이다. 아카이브를 움직이는 설계도가 알고리즘이었다.‘아카이브 망의 설계도인 알고리즘이 교란된다면? 오 그럼, 우리의 기억과 기록은?’문지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우디의 이야기는 다소 황당했지만 그럼에도 문지의 가슴 깊숙이
남해와 서울을 잇는 두 사람의 이 비밀스런 통신이 일어난 이후, 세상에는 신비하고도 괴이한 변종 요정이 생겨났다. 네마조네스는 사실 어느 순간부터 그 변종 요정의 탄생 스토리를 알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몰랐지만 불안하게 보고 있었다. 네마조네스가 예전에 문지의 가방으로 부키와 노타모레를 찾아간 바로 전부터 네마조네스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요정이 인간세계에 직접 개입할 수는 없었다.‘ 이들도 요정일까?’원래 요정은 자연의 힘을 의인화한 것, 태고의 신들이 작아진 것, 멸망한 옛날 종족의 기억과 죽은 자의 영혼, 타락한 천사 등에서
10. 기록을 지우는 괴물“ 박사님, 큰일 났습니다.”새벽 2시. 김 박사는 전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해 연구소에 있는 D-U 프로젝트 책임 연구원 K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새벽에 이런 전화는 불길하다. 연구원 영상이 나왔다.“ 무슨 일인가?”“ 박사님, 저로서도 뭐라고 설명을 드려야 할지... D-U 프로그램이 오늘 오후 4시부터 작 동하지 않습니다. 마치 갑자기 기억 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백지가 되어버렸습니다..”“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인가, 백업 파일은?”김 박사는 어안이 벙벙했다. 무엇보다 최신의 고성능 슈퍼컴퓨
9. 문지의 사랑[오피니언타임스=써니] 문지는 너무 바빠 요정을 본 것을 잊었다. 기말고사 때문에 학교 도서관 열람실로 갔다가, 우연히 한 남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프로필이 일단 근사했다. 남학생 책상 위에 책 몇 권이 눈에 띄었다. 기말고사 기간이라 학생들은 전공서적에만 빠져 있는데 그 자리에는 뀌도 미나 디 쏘스피로의 '나무 회상록'과 르 클레지오의 '사막'이 펼쳐져 있다. 문지가 좋아하는 책들이었다.‘ 얘, 괜찮은데. 4차원에 현실 초월? 후후.’문지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든 남학생이 웃는 눈으로 인
8. 네마조네스의 불안시간이 조금 더 흘러 문지는 대학생이 되었다.하교 길, 문지의 가방 안에서 요정들이 만났다. 네마조네스가 요정들을 호출한 것이다. 부키가 가방 안에 들어 있던 책에서 쓰윽 나왔다. 노타모레는 녹색의 전공 노트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먼저 말을 꺼낸 건 부키였다. 퉁명스럽게 네마조네스에게 물었다.“ 왜 불렀어? 사이베르 생활은 어때?”“ 뭐, 제 인기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죠...ㅋ. 아니 사실은 그것보다.”부키가 잽싸게 말을 끊었다.“ 그럼 뭐해? 요정인데 날개가 없으니 벌거숭이 같은 걸. 게다가
7. 사막의 샘을 꿈꾸는 문지 시대마다 기록과 기억을 유난히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정말로 소중하여 기억하는 것들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네마조네스 이전 과거 시대에는 주로 일기라는 방식으로 남겼다. 그런 일기로 아름다운 이름을 남긴 소녀, 안네가 있었다. 유대인이었다. 게르마니가 국가적으로 아주 야만적인 학살 행위를 할 무렵, 가족과 함께 네덜란드로 피신한 소녀는 다락방에 숨어서 2년간 일기를 썼다. 13살에 선물로 받은 일기장에서 종이의 강인함을 발견했다고 쓸 정도로 일기를 사랑했다. 답답하고 외로운 다락방, 그 폐쇄된 삶
6. 네마조네스의 출현기술은 훨씬 빠르게 사람의 생각을 앞질러갔다. 이제 손가락으로 클릭만 하는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고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책을 사이베르 안에서 찾아 읽고 사이베르가 대신 판단해주었다. 페르푸메의 향을 그리워하는 것조차 어떤 이들은 고리타분하다며 비웃었다.요정의 세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신성한 나무를 기억하는 노타모레와 부키는 사이베르가 보여주는 가공된 세상을, 생각할 시간이 없이 너무 빠르게 변하여 품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연륜이 있는 요정들은 위대한 기억 나무의 말을 되뇌었다. “세상은 늘 균형이 중요하
5. 사이베르한 손에는 시집을, 다른 한 손에는 습작노트를 든 거리의 장발청년은 이제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떨어진 낙엽과 꽃잎을 책 속에 끼워 말렸던 소녀들도 잘 보이지 않았다. 통학버스에서 손수 적은 단어장을 외우던 고등학생의 모습은 지난날의 풍경이 되었다. 주부들의 가계부와 육아일기도 엄지손가락 몇 번이면 끝났다.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는 다들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손 안의 화면만 쳐다본다. 옆 사람한테는 관심도 없었다. 이제 세상은 사이베르(Cyber) 세상이 되었고 도시는 페르푸메의 향이 매우 옅
4. 페르푸메가 옅어지고 있다.부키와 노타모레가 좋아라 수다를 떨었던 후로 세월이 더 흘렀다. 장난감 같았던 사진기가 더 발전했고 놀랍게도 텔레비라는 것이 나왔다. 인간의 기계 능력은 끝이 없었다. 모든 것이 작은 사각 상자 안에 담기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울고 웃고 떠들었다. 인간들은 이제 기계의 힘으로 거칠 것 없는 축소 능력을 구현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책을 읽고 노트를 하는 숫자가 분명히 줄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염려할 수준은 아니었다. 어른들은 텔레비가 바보상자이니 보지 말라고 했고 지식인들은 새 기계를 경멸
3. 페르푸메노타모레와 부키는 위대한 기억의 신목이 마지막에 흘렸던 신비한 향을 떠올리면서 오랜 노력 끝에 마침내 페르푸메(Perfume)라는 향을 만들어 냈다. 겸손한 노타모레는 그 향이 자신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위대한 기억의 나무가 전해준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가 전해준 뜻을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노타모레는 핀란드 숲 쪽을 향해 존경과 사랑의 소리로 중얼거렸다.“ 위대한 기억의 나무님, 당신은 살아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건조한 나무 향의 페르푸메는 처음에는 살랑거리는 바람이 불어야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은은하여 쉽게
2. 노타모레와 부키의 탄생노트로 옮겨 간 요정들은 스스로를 노타모레라고 했다. 노트를 사랑하는(Amore) 요정이라는 뜻이다. 노타모레는 연한 감귤색의 피부와 녹색 기운이 감도는 긴 머리칼에 날개를 가졌다. 노트로 옮겨간 후부터 한 손에는 노트를, 다른 한 손에는 펜을 든 모습으로 변했는데, 점점 더 모습이 바뀌더니 왼쪽 눈은 예전과 다름없지만 오른쪽 눈에는 유선의 줄무늬가 또렷해져갔다. 노타모레는 말수가 적고 수줍음이 많았다. 다른 요정의 말을 잘 듣는 편이었는데, 그럴 때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귀를 기울이고는 했다. 똑 부러지지
1. 위대한 나무의 죽음위대한 창조의 신 오딘의 이야기가 남아 있는 핀란드 북부 로바니에미 지역의 울창한 자작나무 숲에는, 높이를 알 수 없고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가늠할 수 없는 신성한 나무가 있었다. 신목의 나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사람들은 나무의 깊은 뿌리 끝에는 샘물이 있다고 믿었고, 이 물을 미미르(mimir)라고 불렀다. 미미르는 지혜와 기억의 샘물로 사람들은 미미르를 품은 신목을 ‘세계의 위대한 기억’이라고 부르며 공경했다. 이 위대한 기억의 나무에는 녹색 날개를 가진 작은 요정들이 살았다.13세기로 추정된다
노트의 요정저자: 써니(Sunny. H)캐릭터: 김 한제공: 7321디자인편집: 전종령 등장인물문지별명 노트꽁주. 이야기를 좋아하여 가방에는 시집이나 소설책 한 권쯤은 늘 들어 있었다. 대학교 독서와 사진 동아리에서 만난 남자와 4년의 연애 끝에 졸업하자 결혼했다. 책과 노트밖에 몰랐던 문지는 가정생활에도 육아에도 항상 좌충우돌, 아등바등 했다. 그래서 문학책은 요리책으로, 노트하는 습관은 육아일기와 가계부로 바뀌었지만 아직도 가슴 깊은 곳에 소녀시절의 열정을 가진, 이제 막 마흔 된 엄마이다. 주로 해외를 돌아다니며 사진작가로 활
[오피니언타임스=써니] 온라인·모바일 시대가 되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그러나 아주 좋았던 습관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노트하는 습관입니다.네이버 창에 ‘노트 습관’을 치면 이런 글들이 나옵니다.- 메모 습관의 힘- 미루기 습관은 한 권의 노트로 없앤다.- 엄친딸, 엄친아 되는 지름길~ 하루 10분 노트 습관!- 직장 생활을 변화시키는 노트 메모 습관- 인생이 두근거리는 노트의 마법 등등이들은 그러나 역설적으로 요즘 사람들이 종이노트를 현저하게 안 한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안 하는 이유, 못하는 이유를 우리는 어느 정도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