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기수 中國이야기]

▲ 지난 2005년 7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정화 출항 600주년 기념 전시회에서 한 여성이 선박 모형을 구경하고 있다. 명나라 항해가인 정화는 영락제의 명령으로 1405년 첫 원정 길에 올라 동남아 및 아프리카를 항해했다.

[오피니언타임스 함기수 중국이야기]한때 제주 해군기지 건설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는데 지금도 그 여진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언론은 틈나는 대로 ‘중국발 해양위협’에 대해서 특집기사를 내고 있다. 그들은 이어도를 관할 해역으로 규정하고 정기 순찰대상에 포함시켰다. 2012년 9월 첫 항공모함 랴오닝호를 취역시킨데 이어 현재 자체기술로 핵항공모함을 건조중이라고 한다.

모름지기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하는 법, 중국이 급성장한 힘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해양대국으로 진출하려는 꿈을 가시화하고 있다. 그리하여 시대가 영웅을 만들면서 또 한 사람의 영웅이 역사 속에서 살아나와 오늘의 중국을 선봉에서 끌고 있는데, 그가 바로 정화(鄭和)이다.

정화(鄭和)(1371~1434). 명나라의 전략가이며 대항해가로, 윈난성(雲南省) 쿤양(昆陽)출신이다. 영락제 때 7차에 걸쳐 행해진 남해 원정의 총지휘관으로 본래의 성은 마(馬)씨, 본명은 마화(馬和), 법명은 복선(福善), 삼보태감(三寶太監)으로도 불리었다. 1382년 윈난성이 명나라에 정복되어 어린나이에 명나라에 포로로 끌려와 거세되어 환관이 되었다. 그 후 영락제 즉위에 결정적 역할을 하여 정(鄭)씨 성을 하사 받고 대선단(大船團)을 지휘하여 동남아시아에서 서남아시아를 거쳐 아프리카 케냐에 이르는 30여 개국을 원정하게 된다.

정화의 1차 항해는 1405년에 양쯔강(揚子江) 하구의 유가하(劉家河)에서 출발한다. 난징(南京)에서 건조한 8000톤급 대형선 62척에 2만7800명의 장병이 승선하여 베트남-자바-수마트라를 거쳐 스리랑카, 인도 항로를 2년간 항해한 후 1407년에 귀환했다. 당시 선단의 대선이었던 보선(寶船)의 규모는 길이가 137m, 선폭이 56m이고 9개의 돛대가 달려 있었다고 한다. 90여년 후인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할 당시 승무원 88명이 250톤급 산타마리아호 등 세척에 승선했던 것이나 1497년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발견할 때 120톤 급 선박 세척이 사용된 것에 비하면 당시 명나라의 국력과 조선기술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 후 정화는 그가 죽을 때까지 30여년에 걸친 7차례의 항해에서 서남아시아,아프리카를 아우르는 대양(大洋)을 명나라의 영향권으로 확실하게 복속시키게 된다.

정화의 대항해, 엄청난 비용이 들어간 이 항해에서 우리는 당시 중국의 위용과 서양인에 대비되는 그들의 그릇을 엿볼 수가 있다. 항해의 목적이 분명하게 밝혀지진 않았다. 일부에서는 영락제와 황제 자리를 다투었던 건문제를 찾기 위해서 또는 영락제가 일반적인 진상품에 싫증이 나서 먼 곳에서 진귀한 물건을 가져오도록 한, 극히 개인적인 동기가 위주였다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선단의 규모로 봤을 때 이러한 해석들은 억지스런 부분이 있다.

그보다는 명나라의 영향력에 도전하고 있던 베트남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 명나라의 위세를 떨치고, 중화와 변방이라는 전통적인 국제관계를 과거보다 훨씬 큰 규모로 이룩하려 했던 것이라는 해석이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정화의 선단은 그로부터 수십 년 후에 서양인들에 의해 자행된, 자국의 이익과 영토확장을 위한 무자비한 정벌과는 완전히 대비된다. 서양 제국주의 세력들은 원주민을 분열시켜 자기들끼리 싸우게 했고, 자신들을 환대하는 사람들을 배반하고 학살했다.

정화의 함대는 그와 달리 서로 갈라져 싸우는 세력들을 중재하고 화해시켰으며, 적대 세력은 가만 두지 않고 격파했지만 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선물을 주었다. 원주민의 땅을 빼앗거나 식민지로 만들지 않았고, 원주민을 노예로 잡아가지도 않았다. 중국의 종교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정복과 착취가 아니라 명나라의 위력을 과시하고 그 형식적인 지배권을 인정받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화(鄭和)의 위대한 항해와 그 업적은 영락제의 뒤를 이은 홍희제에 의해서 역사 속으로 매몰되고 만다. 그리하여 힘의 균형이 동양에서 서양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었다는 아쉬움과 함께 정화는 오랫동안 잊히게 된다. 그리고 첫 항해가 있었던 1405년으로부터 정확하게 500년 후인 1905년, 중국 근대의 사상가이며 문학가인 량치차오(梁啓超)(1873~1929)에 의해서 비로서 그는 부활의 조짐을 보인다. 량치차오는 500년 동안 지하에 묻혀있던 정화를 끌어내어 ‘민족영웅’으로 부각시키며 정화의 시대가 유사이래 가장 찬란했던 시대라고 역설한다. 해외 원정을 통하여 국위를 선양했던 정화의 위대한 기백을 살려 서구제국주의에 핍박 받던 당시의 중국인들에게 국가의식을 고취시키려던 것이 량치차오의 목적이었다. 머나먼 바다로 나가 천하를 호령하던 정화의 모습에서 그는 국가 해양권을 확장시켜 강한 중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절실함을 보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100년이 다시 흐른 2005년. 바야흐로 대국굴기(大國堀起)와 화평굴기(和平堀起)를 주창하며 세계로 부상하려는 중국 전역에서 ‘정화’라는 이름이 신드롬처럼 휘몰아친다. 정화의 항해를 기념하는 전시회가 열리고 대항해를 다룬 책들이 앞 다투어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된다.

오늘날 중국은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더 많은 석유와 천연가스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이러한 천연자원을 안전하게 수송할 수 있는 원양항로의 확보가 중요하고 따라서 태평양과 인도양등에 그들의 군사기지를 확보하려 하고 있다. 현재 중국은 말라카(Malacca)해협 봉쇄에 대비하고 미국과 인도를 견제하기 위해 미얀마와 스리랑카, 파키스탄 등 인도양 연안 곳곳에 군사시설을 건설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 600년 전, 인도양을 중국의 바다로 만들었던 정화의 대항해를 꿈꾸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해양대국을 지향하는 오늘날의 중국인들은 정화 함대에 대한 진한 향수를 느끼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의 꿈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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