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인의 풍수지리]

▲ 용산 아래 회룡고조형으로 자리 잡은 추사고택

[오피니언타임스=김정인]충남 예산에 가면 삽교천 근방 용궁리라는 곳에 추사고택이 위치한다. 예전에는 이곳까지 바닷길이 열려 있어 서울에서 하루정도면 뱃길로 도착했다는데, 지금은 주변이 육지가 되어 야트막한 산 아래 동네이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년)는 조선시대 후기 시(詩). 서(書), 화(畵)에 능했던 천부적 학자이자 예술가로 영조가 지극히 사랑한 화순옹주와 김한신의 증손자이다. 그가 태어난 고택은 증조부 김한신이 지은 집으로 팔봉산에서 이어진 용산 아래 위치한다.

용궁리 일대는 삽교천 중류에 위치하여 서울에서 인천을 거쳐 배를 타고 하룻길이면 도착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이며, 팔봉산에서 출발한 용이 20리를 꾸불꾸불 오다가 끝자락인 용산에서 나지막하게 혈을 맺은 곳이다. 조선조 당시에는 용궁이 물속에 있듯이 물길이 둘러주었으며 고조부 묘는 코끼리의 코에 해당하는 자리로, 화순옹주 묘 앞마당까지도 물이 들어와 있었다고 한다. 물은 재물로 보며, 물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으면 재물도 풍족하게 유지된다고 보았다.

추사고택은 용이 머리를 획 돌려 자기가 출발한 산인 팔봉산을 다시 바라보는 회룡고조형의 형국에 위치한다. 혈상이 높으면 당대에 명문이 되고 혈상이 낮은 것은 명문의 시초가 되라는 곳이라고 하는데 추사고택은 혈상이 낮은 곳에 위치한다.

추사고택은 솜이불같이 포근한 기운을 풍기는 야트막한 둔덕들이 둘러싸고 있으며 주변 어디를 둘러보아도 날카로운 느낌을 주는 산이 전혀 없다. 집터 앞의 안산은 마치 누에가 가로로 길게 누워 있는 듯한 야산일 뿐 아니라 청룡자락과 백호자락을 둘러보아도 높은 산이 없다. 그런가 하면 집 뒤의 내룡(來龍)을 보아도 해발 100m도 안 되는 야산이라서 위압감이 전혀 느껴지질 않는다. 한마디로 추사고택 주변 산세의 특징은 살기(殺氣)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야트막한 둔덕뿐이라서 주변 사방에 살기가 보이지 않는 산세는 조선시대 양반들이 가장 선호하던 지역이었다. 양반들이 좋아하던 산세의 모범답안이 이곳이라고 해도 좋다.

추사고택에는 음택과 양택이 함께 나타난다. 추사고택의 왼쪽에는 증조부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묘, 더 왼쪽에 고조부인 김홍경의 묘가 있다. 바로 오른쪽에는 추사선생의 묘가 있어 추사고택을 중심으로 좌우에 묘지가 위치한다.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되면 대통령의 생가를 보존하고 대통령이 죽으면 생가에 기념관도 만들고 묘지도 만들어 대통령의 업적을 기린다. 추사고택은 추사가 태어난 곳으로 과천에 있던 추사의 묘지를 지난 1937년 이곳으로 이장하여 모셨다. 추사묘는 팔봉산에서 연결된 야트막한 산에서 용맥이 내려와 회룡고조형으로 자리한 곳이다. 묘 우측에 기념관이 있고 좌측에 고택이 있다. 음양택이 함께 동거하는 추사고택은 김정희 선생의 일생과 사상을 돌아보는데 아주 적합해 보인다.

▲ 사후 81년만에 과천에서 예산 추사고택 옆으로 이장된 추사묘

한편 고택이나 묘지를 답사하러 가보면 특정한 성씨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 많다. 보통 한양에서 벼슬을 해도 임기를 마치면 고향으로 내려와서 고향을 지켰다. 조선 시대 양반이 되는 조건은 ①과거합격자, 저명한 학자를 조상으로 모시고 있어야 한다. ②여러 대를 걸쳐 동일한 지역에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어야 한다. ③양반의 생활양식을 보존하고 있어야 한다. ④결혼 상대는 1~3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양반 집안들은 한군데 모여 살아야 하고 결혼도 함부로 못하고 출신성분을 철저하게 따졌다. 추사선생도 당시 풍습을 따라 이곳에 근거지를 마련했다고 한다. 추사의 흔적을 되짚어보며 그의 사상과 지혜를 생각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