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인의 풍수지리]

▲ 정약용의 생가, 여유당의 모습

[오피니언타임스 김정인 풍수지리]조선 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은 영조 38년 1762년 6월16일,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두물머리 마현마을에서 태어났다. 다산은 75년 인생 중 10여년의 벼슬살이, 18년의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제외하고는 50여년을 마현 고향마을에서 살았다.

마현마을은 한양 가는 길에 말을 타고 넘어가는 고개라 하여 마현(馬峴)이라고 하는데 마재라고 부르기도 한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수되는 마현마을은 조선 초기의 서원부원군 한확(1403~1456)의 능이 있어 능내리라고 하는데 두 개의 강물이 합수되어 만나는 두물머리(兩水里) 아래에 위치한다. 두 강줄기를 품고 있는 두물머리는 한 물길은 금강산(1638m) 기슭에서 발원하여 휴전선을 넘어와 북한강으로, 다른 물길은 태백산 금대봉(1418m) 자락의 검룡소(儉龍沼)에서 발원하여 남한강으로 흐른다. 북한강의 물은 차갑고 물살이 거세며 물빛이 푸르러 “숫물”이라고 하고 남한강의 물은 따뜻하고 순하며 붉어서 “암물”이라고 하는데 두 물이 만나서 합수되는 곳이니 음양의 조화가 잘 어울어진다고 본다.

다산 선생이 태어난 생가터는 한북정맥 예봉산(683m)의 끝자락인데 천리를 달려온 용맥이 물을 만나 머무르는 곳이다. 이런 곳을 산진처(山盡處)라고 하는데 풍수에서는 생기(生氣)가 멈추는 곳이라고 본다. 생가터 뒷 봉우리에는 다산묘가 모셔졌는데 이곳은 용혈사수의 기본 조건이 잘 갖추어진 곳이다. 천리를 달려온 용이 마지막에서 생기를 응집한 곳이며 좌로는 청룡의 능선이 우로는 백호의 능선이 감싸주며 앞으로는 한강물이 궁수(弓水)로 환포하며 조안산이 마주 한다. 한강물은 좌에서 우로 감싸주는데 청룡은 짧고 백호는 길게 역관을 하여 주며, 외백호도 또다시 환포하여 주니 다산 생가와 묘터는 풍수적 길지의 조건을 갖추었다.

이곳을 지나던 과객이 마을 앞을 지날 때 해가 저물어 쉬게 되었는데 새소리가 듣기 좋고 물이 좋아 가려했던 길을 멈추고 영주했다고 하여 이곳 동네 이름을 조동(새울, 새월)이라고 하였다고 하는데 현재의 조안(鳥安)면의 지명은 바로 이 조동에서 유래하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별장으로 이용하는 곳이 이곳 조안면 일대이다.

다산 정약용은 그를 아끼던 정조(1752~1800)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 신유사옥 때 전라남도 강진으로 귀향을 갔다. 18년간 다산초당에서 머물면서 학문에 몰두해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다산의 사상이 담긴 500여권의 책으로 실학을 집대성했다. 강진의 다산 초당도 비를 피할 수 있는 자그마한 초막이었는데 그 입지를 보면 호남정맥의 지맥 땅끝기맥의 만덕산(412m) 산기슭에 좌우의 산의 능선들이 포근하게 감싸주고 앞으로는 만덕호가 펼쳐지는 명당지역에 위치한다.

▲ 다산 생가인 여유당 뒤편 봉우리에 모셔진 다산 묘

다산 정약용은 성리학자, 철학자, 역학자. 역사학자, 문학가, 지리학자, 정치가, 경제학자, 법학자. 건축가, 과학자, 의사 등등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조선 최고의 실학자이며 성리학자였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 그리고 죽어서 뒷동산에 묻혔으며 이곳 다산 생가터에는 사당, 기념관, 문학관, 묘소, 생가(여유당), 문화의 거리 등 다산의 유적들이 고스란히 한 군데에 집합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으며 그의 사상을 짚어보며 그가 남기고 간 유적을 통하여 실사구시의 학문을 다시 되새기고 있다.

명당은 생기(生氣)가 모이는 편안한 지역이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산에서 인물 나고 물에서 재물이 난다고 하는데, 산과 물이 잘 어울어지는 다산 유적지, 선조들의 사상을 돌아보며 우리들의 몸의 가짐도 새롭게 하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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