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인의 풍수지리]

▲ 검단산 끝자락 산진처에 자리 잡은 태조 이성계의 능, 건원릉

[오피니언타임스 김정인 풍수지리]조선조의 왕은 27대까지 지속됐으며 조선의 왕릉은 왕비와 추존왕을 포함하여 42기에 달한다. 그 중 태조인 이성계(1335~1408)의 능은 검암산 아래 모셔져 있으며, 이곳을 건원능(建元陵)이라 하고, 건원릉이 있는 곳은 한양의 동쪽에 왕릉이 9개나 있어 동구릉(東九陵)이라 부른다. 한양의 서쪽에 왕릉이 5개가 모셔진 곳이 있는데 이곳은 서오릉(西五陵)이라 부르며, 파주에는 왕릉이 3개가 모셔진 곳이 있어 파주3릉이라고 한다.

조선은 1392년 개국하여 1910까지 518년간 이어졌다. 풍수지리에서는 건원릉을 평가하면서 20대의 왕이 지속될 것으로 보았고, 세종대왕(1397~1450) 능을 세곡동에서 여주 영릉으로 이장하면서 영릉의 명당기운으로 조선이 100년이 더 이어졌다고 이야기한다. 한편 안동김씨의 세도에 밀려 왕권이 제구실을 못하던 시절, 흥선대원군(1820~1898)은 아버지 남연군 이구(1788~1822)를 가야산 명당터에 모시고 왕권을 회복하는데 이곳은 2대천자지지(2大天子之地)의 자리라 결국 조선은 막을 내렸다고 이야기 한다. 흥선대원군은 비록 2대의 왕이 나올 자리라고 하여도 왕권을 회복할 수 있다면 이곳을 차지하고 나중에 자신이 명당에 들어가면 왕조는 계속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조선의 국운번창을 염려한 일제는 흥선대원군의 묘를 다른 곳으로 이장하고 남연군묘의 용맥까지도 훼손했다.

이렇듯 왕릉을 어디에 모시는가는 왕조의 존속과 관계가 된다고 보아 왕릉의 선정은 국가대사 중의 하나로 여겨져왔다. 태조가 잠든 건원릉을 보면 조선조의 개국공신인 남재(1351~1419)의 신후지지(身後之地, 살아 있을 때 미리 잡아둔 묏자리)와 바꾸고 나서 근심을 잊었다하여 환궁하던 고갯마루를 망우리(忘憂里)라고 하는 기록이 전해진다. 태종은 태조 이성계가 고향인 함흥땅에 묻어달라고 유언했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검암산 아래 모시고 아버지의 유지를 들어 고향땅에서 흙을 가져와 봉분을 덮고 고향의 억새풀을 심었다고 하는데 그 억새가 지금도 자라고 있다.

건원릉은 한북 정맥의 지맥인 검암산 아래에 자리했다. 백두대간에서 이어진 한북정맥의 수원산(710m, 왕숙천의 발원지)이 태조산, 수락산(637m)이 중조산, 불암산(508m)이 소조산, 검암산(171m)이 주산이 되며, 우로는 외당수 중랑천의 흐르고 좌로는 왕숙천이 흘러 한강과 합수 후 다시 중랑천과 만난다. 수원산은 왕숙천의 발원지요, 왕숙천은 태조 이성계가 함흥에서 돌아오는 길에 8일을 머물렀다하여 왕숙천(王宿川)이라고 하였다고 하는데 왕숙천은 태조가 잠든 건원릉을 적셔주는 하천으로의 그 의미를 더하고 있다.

▲ 건원릉 능침에서 바라본 전면의 조안산의 모습

건원릉이 명당의 혈지가 아니라는 주장도 최근에 많이 주장되고 있으나 건원릉이 위치한 곳을 거시적으로 보면 이렇듯 산과 물이 장원하며, 미시적으로 살펴보아도 풍수의 기본요건을 갖추었다. 주산으로부터 용맥을 타고 내려오며 용혈사수의 관점에서 혈의 요건을 충족한다. 용은 근본이 확실해야 하고 변화가 생명인데, 태조산인 수원산에서 수락산, 불암산, 검암산을 거치면서 거친 산들이 살기를 벗고 박환(剝換)이 되었으며, 위이굴곡, 상하기복 등 변화를 거쳐 과협, 속기, 결인 등 입수의 요건을 갖추었다. 혈장은 천리를 달려온 용이 물을 만나 머무르는 산진처(山盡處, 산의 능선이 끝나는 곳)이며, 동그랗게 솟아 전후좌우 팔방에서 겹겹이 산들이 둘러싸고 있어 장군대좌형, 맹호하산형 등으로 평가된다. 물은 외당수 왕숙천과 중랑천, 한강이 감싸주고 내당수가 가까이에서 감싸주고 수구는 좁게 관쇄(문을 잠금)되었다.

동구릉은 1408년 태조 이성계를 모신 이후, 5대 문종(1019~1083)과 현덕왕후, 14대 선조(1552~1608)와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 16대 인조(1595~1649)의 계비 장렬왕후, 18대 현종(1641~1674)과 명성왕후, 20대 경종(1688~1724)의 비 단의왕후, 21대 영조(1694~1776)와 계비 정순왕후, 24대 헌종(1827~1849)과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 23대 순조의 세자인 효명세자 익종(1809~1830)과 신정왕후(1808~1890) 등 9개의 능, 17위가 482년(1408~1890)사이에 모셔졌다. 동구릉이 명당이 아니라면 어떻게 482년간에 걸쳐 왕릉이 계속 모셔졌겠는가?

명당은 산과 물이 모여든다. 사람들이 많아 찾아오고 편안함을 느낀다. 또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와서 쉬며 치유받는 곳이다. 동구릉의 중심룡 끝자락에 모셔진 건원릉, 우로는 서쪽에 5릉, 좌로는 동쪽에 3릉을 거느린 형국인데 바로 이곳이 조선조 518년을 이어온 터전이니 이것이 명당임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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