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인의 풍수지리]

▲ 건재고택, 외암 이간선생이 태어난 곳, 뒤로 설봉산의 봉우리가 보인다.

[오피니언타임스 김정인의 풍수지리]충남 아산에 있는 외암마을은 약 500여년전 조선중기에 형성된 마을로 가가호호 주민들이 살고 있어 살아있는 민속박물관이다. 반가의 고택과 5.3km에 이르는 나지막한 돌담길, 전통정원 등이 잘 보존되고 있는 국내 최고의 민속마을 중의 하나다. 우리나라 6대 민속마을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경주 양동마을과 안동 하회마을, 고성 왕곡마을, 순천 낙안읍성마을, 아산 외암마을, 서귀포 성읍마을로 모두 다 하나같이 배산임수의 풍수와 자연경관이 뛰어나고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녔으며,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된 한국의 명고을이다.

이곳 외암마을은 설화산(雪華山, 447m)을 주산으로 하여 마을 앞으로는 작은 시내물이 합수되어 마을을 감싸주며, 앞으로는 넓은 들판과 조안산이 마주하는 풍수적 명당마을이다. 설화산은 그 봉우리가 뾰족하여 붓 모양을 이루기도 하고, 가운데 봉우리가 우뚝하여 봉황이 날개를 편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고, 선인이 독서를 하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그 봉우리가 5개라 오봉산이라고도 부른다.

외암마을은 설화산을 배산으로 광덕산과 설화산 계곡에서 나오는 물길이 합수하며 마을을 감싸주며 흘러간다. 그래서 외암마을은 물을 건너야 들어갈 수가 있다. 풍수에서는 계수즉지(界水則止)라 하여 산이 물을 만나야 기운이 멎고 음양이 조화가 된다고 하는데, 설화산에서 이어진 용맥이 물을 만나 멈추고 물길이 마을을 감싸고 도니 풍수적으로는 산관인정(山官人丁) 수관재물(水官財物)의 완벽한 길지이다.

마을의 모양은 길죽한 타원형으로 마을 중앙으로 동서축의 길이 있고 좌우측으로 작은 샛길이 있어 집들이 배치되었다. 중앙의 길은 나무의 줄기가 되고 작은 샛길은 나무의 가지가 되어 가지마다 열매가 맺는 마을의 배치가 되었다. 마을의 길은 나지막한 돌담길로 계속 이어지는데 돌담길의 정취가 특별하고 밖으로부터 바람도 잘 갈무리 된다. 북서쪽으로는 북서풍에 대비하여 소나무 방풍림도 조성되었다.

주산과 안산의 조응을 보면 주산인 설화산이 높고 안산인 면잠산(眠蠶山)이 낮아 주와 객의 관계가 분명하다. 설화산의 봉우리가 뾰족하고, 화의 기운이 강하여 마을안으로 인공수로를 만들어 집집마다 물길을 연결하였다. 물은 연못에 물도 담고 빨래터도 되며, 화재시에는 방화수의 역할도 한다.

주산으로부터 이어지는 마을의 지기를 끊지 않도록 수로는 얕게 설치했다. 비보풍수로서 인공수로를 두었다고 보여진다. 외암마을은 예안이씨의 집성촌이다. 예안이씨가 처음 들어와 살게 된 것은 조선 명종 때 장사랑(將仕郞) 벼슬을 지내 이정 때이고, 예안 이씨를 빛낸 인물은 이정의 6대손인 외암 이간(李柬, 1677~1727)선생이다. 이간의 호인 외암(巍巖)이 마을의 이름이 되었다. 이간 선생은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율곡-사계-우암-수암-외암으로 이어지는 성리학자다. 정조대왕이 이조 참판을, 순조대왕이 이조판서를 증직하고 문정이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이간이 태어난 곳은 현재의 아산 건재고택인데 설화산의 주봉을 배산으로 자그마한 용맥이 연결된 한 마을의 중앙에 위치한다.

▲ 참판댁, 고종이 이간선생 6대손 이정렬참판에게 하사하여 지은 집

외암마을에서 풍수적으로 중요하게 볼 곳이 아산외암 참판댁이다. 이간의 6대손으로 고종의 아들인 이은의 가정교사를 맡기도 하였던 퇴호 이정렬(1865~1950) 참판의 집으로 할머니는 명성황후의 이모가 된다. 고종의 하사품으로 지어진 이 집은 창덕궁의 낙선재를 본 따 지은 집으로 솟을대문을 통하여 밖을 내다보면 마을의 안산인 면잠산이 노적봉의 모양으로 정확히 들어온다. 물이 좌에서 우로 감싸돌고 주산과 안산을 축으로 하여 안채와 사랑채 솟을대문을 배치하였다. 앞으로는 문전옥답이 펼쳐지는 부자명당이다.

외암마을은 500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 민속마을이다. 양택지는 지리(地理)적 조건도 중요하지만 먹고 살 수 있는 생리(生理)도 갖추어져야 한다. 개울을 건너가면 넓은 평지가 있어 농업시대인 조선조에는 아주 살기 좋은 마을이었다. 그러나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생리에 대하여 생각해 볼 때가 되었다. 50여 호가 살고 있는 외암마을, 무엇으로 생리를 해결할 것인가? 외암마을이 민속마을의 관광자원으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하여는 마을의 역사와 스토리도 보강하고 중요한 고택도 더 개방되어야 한다. 대문이 닫힌 고택이 대부분이다. 그러면서도 입장료를 받고 있다. 이곳을 더 개방해 관광객이 보다 편리하게 조선시대의 역사를 보고 체험하는 문화의 체험장이 될 수 있도록 하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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