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기수 中國이야기]

 

[오피니언타임스] 최근 메르스의 공포가 전국을 강타했다. 환자가 입원했었거나 거쳐 간 병원을 중심으로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들은 외부와 일체 차단되는 격리조치가 단행되었다. 한산해진 거리와 마스크를 쓴 채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문득 중국에서 겪었던 사스(SARS)의 공포가 떠오른다.

일부 언론에서는 메르스에 대한 한국의 늦장대응을 질타하면서 중국의 재빠른 대처를 기사화했다. 한국에서 메르스가 급속히 확산되자 중국 당국은 ‘사스의 영웅’ 중난산(鐘南山) 공정원 원사를 수장으로 한 ‘메르스 통제를 위한 전문가조’를 출범시켰다고 한다. 중 원사는 2002년 중국에서 사스가 발생했을 때 사스 방역에 공을 세워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던 인물이다. 이 기사는 누리꾼들의 반응을 빌어 우리에겐 중난산과 같은 전문가가 없음을 한탄했다.

사스(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SARS)는 2002년 11월 중국 광둥성에서 발생, 2003년 7월까지 유행하여 8096명의 감염자가 발생하고 774명이 사망하였다. 2003년 3월 홍콩의 미국인 사업가가 사망하면서 처음으로 보고되었고, 그를 치료한 중국·베트남·홍콩의 병원 의료진도 차례로 감염, 이후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대기를 통해 전염되는 질병이라 비행기 승객 등을 통해 몇 주 만에 37개국으로 퍼질 정도로 빠르게 퍼졌고, 독감 같은 일반적인 호흡기 질환과 달리 10%라는 고도의 사망률 때문에 전 세계 보건당국엔 비상이 걸렸고 대중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당시 광둥성의 식용 야생동물 시장에서 보신용으로 거래되던 사향고양이, 너구리, 흰 족제비 등이 사스의 원인이었음이 밝혀지면서, 인간의 보신에 대한 욕망이 ‘신의 저주’를 불렀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민심은 흉흉했다.

중국 베이징 대학은 사스가 중국경제에 미친 손실이 2100억 위안(약37조원)에 달한 것으로 분석했다. 미국의 투자은행인 모건 스탠리는 사스 창궐 후 아시아의 경제성장전망을 5.1%에서 4.1%로 낮췄고, 2003년 FIFA 여자 월드컵은 개최지가 중국에서 미국으로 급거 변경되기도 했다.

당시 나는 중국 산둥성 칭다오에 살고 있었다. 사스의 공포는 광대한 중국 대륙의 어느 한 곳 예외가 없었다. 당시 전 세계에는 중국인 기피현상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에게 사스 전염의 공포보다 더 심했던 것은 중국 당국의 살벌한 격리조치였다.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지만 당시 중국의 의료상황은 지금의 우리와 비교해서는 천양지차였다. 사회주의 특유의 일사분란함은 지금 우리가 밥 먹듯이 부르짖는 인권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자발적인 신고와 역학조사는 당시 중국의 환경과 의식수준으로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기침만 하면 수갑을 채워 닥치는 대로 끌고 간다. 한번 격리되면 식구들을 만나기는커녕 태반이 죽어 나온다. 기침을 하는 사람을 신고하지 않으면 주위 사람들이 처벌받는다. 격리되었다가 필사적으로 탈출하여 집으로 돌아 온 주변 사람이 있다. 갖가지 확인되지 않은 유언비어들이 공포심을 더욱 자극했다. 지금 우리처럼, 당시 중국에도 SNS가 발달되고 모든 보도가 통제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마도 또 다른 공포에 지레 질식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중국에 사는 외국인들의 대탈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전 세계적으로 만연해 있던, 중국인이나 중국에 거주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피현상이었다. 우리는 단지 중국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가까이 하면 안 될 죄인이었다. 지금에야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지만 당시 우리 주변에는 웃지 못 할 해프닝이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가까운 친인척들이라도 중국에서 온다고 하면 받아들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큰아이가 베이징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베이징은 그야말로 사스의 본산이었다. 베이징으로부터의 모든 것이 통제되고, 중국 내에서도 베이징 사람들에 대한 기피현상이 일고 있었다. 학교가 문을 닫고 일단 식구들끼리라도 같이 있자하여 우리는 그를 칭다오로 불렀다. 아들은 당시 거짓말처럼 기침을 하고 있었다. 베이징에 있던 아들이 왔다는 소식에 같이 사는 이웃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그들은 의심의 눈초리로 자주 안부를 물어왔다. 우리는 다시 칭다오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딸아이와 함께 두 아이를 서울로 보내기로 했다. 누군가의 신고에 의해서, 언제 어떻게 공안(公安:경찰)이 들이닥쳐 격리시킬지 몰랐기 때문이다. 중국 사람들의 신고정신은 투철하다.

지금도 우리는 그 때의 얘기를 하며 아이들 외가의 고마움을 얘기한다. 당시 사스는 곧 죽음이고 중국에 사는 사람들은 사스의 온상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들은 기침하는 외손주들을 기꺼이 받아 들였다. 물론 당시의 기침은 단순 감기였었다.

서양의 일부 언론들은 2002년 장쩌민으로부터 권력을 막 이양 받은 후진타오가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보도를 했다. 당시 후진타오는 발병의 근원지인 광둥성을 직접 방문하고 현장에서 환자를 만나는 등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 해 여름이 가고 사스 퇴치를 자축하는 행사가 전국 곳곳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거리마다 ‘경축 사스 퇴치’라는 현수막이 걸렸고 요란한 고적대의 팡파르가 며칠간 계속되었다.

최근 메르스와 관련된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다시한번 인간사 모든 것이 동전의 양면 같은 이중성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도 당시 중국처럼 무자비한 통제와 격리를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시간이 가면 전염병은 약화될 것이고, 아마도 인권에 대한 또 다른 비판과 엄청난 질책이 쏟아졌을 것이다. 초기 대응 부실에 대한 빗발치는 질타를 보면서, 남 탓과 자기주장에 너무도 길들여진 우리 사회 분위기를 돌아보게 한다. 어쩌면 이것이 단호하고 냉정하게 대처해야하는 우리 당국으로 하여금,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한 원인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결과에 따라서 그 인식을 달리한다. 사스당시 한국에 있었던 사람들은 중국에서의 무자비할 정도의 통제와 억압을 모른다. 중국의 사스에 대한 대응책을 칭찬하는 글을 보면서 문득 당시의 흉흉했던 분위기가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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