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두 네오시스템즈 회장 인터뷰]

오디오에 꽂혀 집안 논밭을 팔아치웠고 산에 미쳐 전국 200대 명산을 헤집고 다녔다. 컴맹이지만 IT기업 회장이며 페이스북 친구만 5000명에 달한다. 마음 뺏긴 오지 산장에서 수년간 머슴 노릇을 하거나, 페친 찾아 맨몸으로 팔도유람도 다반사다. 파란만장, 좌충우돌 인생사에 관심이 쏠렸다. 매달 책 20~30권을 해치우는 독서가이자, 막걸리집 사장이며, 고려황칠 홍보대사이자, 전 코스닥 기업 대표이자 글쟁이인 최병두(59) 씨를 만났다.

막걸리집 주전자골 꼴통점에서 만난 최병두 씨

마음이 동하면 일단 움직인다

보통 인터뷰 전에 취재원 정보를 수집하고 질문을 준비한다. 그런데 이번엔 종잡을 수가 없다. 대체 뭐하는 사람인가?

우선 네오시스템즈 회장. IT업체로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관련 회사다. 주력 사업은 ‘실시간 위치기반 양방향 리서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내가 컴맹이라 자세한 건 모른다. 사업계획서 보내줄테니 읽어봐라.

컴맹인데 어떻게 IT기업을 만들었나.

두 친구를 알게 됐는데 한명은 ‘위치기반 설문 서비스’ 관련 특허가 있고, 다른 한명은 키오스크(터치스크린에서 상품정보 등을 제공하는 무인시스템)를 전국에 보급한 친구다. 둘을 붙여놓으면 뭔가 일이 되겠다 싶어서 소개시켜줬다. 둘이 지지고 볶더니 2014년 회사를 설립했다. 지금은 비콘 마케팅앱 ‘레알띵’ 등을 서비스하고 있다.

시작부터 당황스러운데, 다른 일은 뭘 하고 있나.

보다시피 막걸리집(주전자골 꼴통점) 대표다. 누가 “차릴테니까 맡아주세요”해서 지난해 12월부터 운영하고 있다. 평소 막걸리를 좋아하니 재밌을 것 같았다. 대표로 있는 대신 메뉴 개발 등 운영 전권을 부여받았다. 다른데서 먹을 수 있는 장수막걸리 같은 건 팔지 않고, 지역 특산 막걸리를 판다. 여기 있는 안주도 다 직접 개발한 것들이다. 페루의 산삼으로 불리는 마카 새싹 골뱅이무침 등이 유명하다.

다른 직함이 더 있나.

고려황칠이라고 황칠나무 진액 등 건강기능식품 파는 곳에 홍보대사로 있다. 전남 장흥산 황칠나무로 만드는 건데 당뇨, 간 기능 개선 효과가 탁월하다. 내가 당뇨가 좀 있는데 아는 사람 소개로 먹었다가 엮여서 고문 비슷하게 있다.
공식 업무는 그 정도다. 이밖에 창덕궁 근처 도자기 공방 우일요에 가서 화가들을 만나고 그림 그리거나, 닥치는 대로 책 읽으며 산다. 페이스북에 매일 2~3개씩 글을 올린다.

여러 일을 하는데 일관성이 없는 것 같다.

호기심이 많아서 안 해본 일에 끌린다. 한번 가본 길은 다시 가지말자는 주의다. 마음이 동하면 움직이는 성격이라 나도 내가 어디로 튈지 모른다.

페친에 빈대 붙어 팔도유람

페친(페이스북 친구)들에게 먹을 걸 얻어먹으며 수년간 전국을 떠돌았다던데…

얻어먹었다고 하면 좀 그렇고… 페북 하다보면 지방에 있는 친구들이 놀러오라고 한다. “평소 올리는 글 재밌게 보고 있는데, 원고료도 못주고 미안하니 밥 한 끼 사고 싶다”는 식이다. 그럼 거기 놀러간다. 온라인에서만 보던 페친과 실제로 밥도 먹고, 술도 먹으니 얼마나 재밌나. 당시 상황을 글로 올리면 주변에 사는 다른 페친이 만나자고 부른다. 그렇게 3박4일 일정이 열흘 일정으로 바뀌곤 한다. 본격적으로 ‘페북여행’을 다닌 건 4년 밖에 안됐다.

본인 돈은 정말 안 썼나?

차비랑 찜질방비 정도는 들고 가는데 쓰는 일은 거의 없다. 한번은 어떤 페친이 놀러 오래서 갔더니 호텔방 잡아주고 일식집 가서 거하게 밥을 사더라. 내심 뭐 부탁할거라도 있나 찜찜했는데, 그 분이 마음 복잡할 때 내가 쓴 글을 보고 정말 속시원하게 웃어서 꼭 한번 만나고 싶었다고 했다. 대부분 이런 식이다. 다들 편한 마음으로 만나고 헤어진다.

페북 친구가 5000명에 육박한다. 이 정도면 페북스타 수준인데 주로 어떤 글을 올리나. 비법 좀 전수해달라.

특별한 비법은 없고 읽기 편한 글을 쓴다. 생활 이야기, 주변 이야기, 누굴 만났는데 이런 일이 생겼다 같은 가벼운 내용을 올리는데 소소한 삶의 흔적들이 진솔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사람들은 글을 쓸 때 당시 상황을 포장하는 경향이 있는데 난 가급적 꾸미지 않으려 노력한다. 진정성 있게 쓰는 게 비법이라면 비법이다.

페북은 언제부터 시작했나. 그리고 컴맹인데 페북으로 소통을 한다?

페북은 2012년 우연한 계기로 시작했다. 어느 날 기똥차게 맛있는 막걸리 만드는 사람을 알게 됐는데, 이 사람이 만들 줄만 알았지 홍보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막걸리 판매 사이트 가보니 ‘회원0, 주문0’ 이더라. 좋은 막걸리가 묻히는 것 같아 안타까워 사이트에 ‘천방지축 호랑이’라는 코너 만들고 칼럼 비슷한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인기 글은 조회수 1000개가 넘기도 하고 알음알음 입소문이 나면서 막걸리 주문이 크게 늘었다. 당시 주변에서 “제대로 홍보하려면 페이스북을 써봐라” 해서 페북에도 본격적으로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컴맹이라 페북은 스마트폰으로만 한다.

인터뷰 도중 나눠마신 막걸리와 안주로 나온 마카 새싹 골뱅이무침. 멸치처럼 보이는 안주는 솔치라 부르는 청어 새끼다.

잘나가는 CEO부터 ‘털보아저씨’까지

한때 잘나가는 기업 CEO였다고 들었다. 지금은 생활이 안정적이지만 페북에서 빈대 붙는 신세가 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을 것 같다.

본래 고향은 마산, 본적은 경남 고성 깡촌이다. 평범한 농사꾼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했다. 첫 직장은 외국계 은행을 다녔고, 두 번째가 증권회사 국제부, 마지막으로 대기업 국제금융부에서 일했다. 각각 5년, 2년, 7년 정도 다녔으니 대략 15년쯤 직장생활을 한 셈이다.
재밌는 건 다 스카웃으로 옮겼는데, 옮길 때마다 봉급이 3분의 2로 떨어졌다. 외국계 회사가 봉급이 세고, 금융이랑 제조업은 또 다르니까. 연봉이 줄어드는 대신 내가 맡은 업무에 대해선 누구도 시비 걸지 못하도록 전권을 달라고 약속받았다.

왜 이직했나. 보통 더 많이 줘야 가는 것 아닌가.

호기심이 많아서 그런지 안 해본 일에 끌렸다. 평소 새로운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편이라 관심있는 분야도 중구난방이다. 책도 주로 인문 쪽으로 읽지만, 종교, 철학, 그림, 여행 닥치는대로 본다. 계속 궁금증이 생기니까.

마지막 직장은 왜 그만뒀나?

당시 직속상관이 있었는데 내가 일하는 방식을 굉장히 싫어했다. 제멋대로 출근하고 천방지축으로 일하는데 성과는 나오니 뭐라 할 수는 없고 아마 난감했을 거다. 그래서인지 내가 하는 일마다 사사건건 반대했는데, 어느날 중요한 제안서를 두고 서로 부딪혔다. 결국 내가 낸 제안이 채택돼 성과를 냈고, 이유 없이 반대하던 그분은 자회사로 좌천됐다. 그 이후로 왠지 모를 죄책감이랄까, 1년 반 정도 불면증에 시달리다 직장을 관뒀다. 기본적으론 월급쟁이에 대한 환멸이 컸던 것 같다.

그 다음엔 뭘 했나.

코스닥 상장 회사에 1년 반 동안 대표이사로 있었다. 모 전자회사 창업주가 갑자기 죽으면서 경영 공백이 생겼는데 금융업계 쪽에서 추천 받아서 그곳을 맡게 됐다. 황당한 게 그 회사 연관되서 3~4명이 배임 횡령으로 실형을 받았다. 내가 부임하기 전에 직원들이 비리를 저질렀더라. 나는 직접 상관은 없었는데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벌금 100만원 형을 받았다. 그런데 막상 생돈 100만원을 정부에 내려니 돈 아깝고 억울했다. 그래서 감옥에 가서 노역을 했다.

돈 아까워 감옥엘 직접 들어갔다고?

벌금 미납으로 교도소 가면 하루에 5만원씩 탕감해주더라. 내가 살면서 언제 또 감옥에 가보겠냐 싶어서 갔다. 나름대로 고민 많이 한 결정이다. 아무튼 그때 감옥 간 경험을 소재로 페북에 ‘화려한 휴가’라는 제목을 달고 글 10여개를 올렸는데, 반응이 참 좋았다.

의미있는 시간들로 삶을 채우자

왠만한 괴짜는 명함도 못내밀 것 같다. 그리고 뭘 했나.

산장에서 머슴 노릇을 했다. 96년도에 직장생활을 접은 뒤 배낭여행을 다녔다. 산을 좋아해서 전국 200대 명산은 거의 다 가봤다. 어느날 아는 선배가 “지인이 산장 차렸는데 같이가자”고 해서 따라갔다. 근데 그 산이 하필 김신조 간첩단이 도망간 도주로 부근이어서 한동안 폐쇄됐다가 개방한 곳이다. 마치 비무장지대처럼 산이 완전 살아있는데 너무 좋아서 산장 주인에게 부탁해 눌러 앉았다.

산장 생활은 어땠나.

5년간 있었는데 당시 별명이 털보아저씨였다. 지금도 수염이 있지만 그때는 훨씬 심했다. 머리는 산발에 수염은 가슴까지 기르고 야인처럼 살았다. 낮에는 책 읽고 산에 가서 더덕 캐고, 밤에는 손님들 불 피워주고 심부름하고. 손님이 술 한잔 주면 감사히 받아먹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나를 편견 없이 대하는 게 좋았다. 보통 살면서 항상 꼬리표가 붙어다니잖나. 학교는 어디 나왔고, 어디 출신인지 등등. 산장에 있을 때는 다들 내가 중퇴인 줄 알았다. 색안경 끼고 보지 않는 게 너무 좋았다.

뭐 하나에 꽂히면 올인하는 스타일 같다.

고등학교 다닐 때 오디오에 미쳤던 적이 있다. 75년도에 450만원짜리 오디오를 사달라고 아버지께 떼를 썼다. 당시 집 2채 값이었는데 당연히 사줄 리가 없지. 그런데 결국 얻어냈다. 손이 귀한 가문인데다 장손이 대학 안가겠다고 몇 달간 고집부리니 사주시더라. 그 오디오 사려고 아버지께서 집안 논밭을 팔았다.
마란츠라고 독일제인데 커다란 스크린테이프를 돌리는 형태였다. 그 오디오가 웬만한 음악감상실보다 더 좋았다. 덕분에 내 방은 항상 친구들이 모이는 사랑방이 됐다. 오디오 사랑은 한동안 계속돼서 잘나갈 때는 앰프와 스피커 연결하는 케이블 선 1m에 500만원까지 써봤다.

보통 사람들은 살면서 앞뒤를 재고 행동한다. 선을 긋고 정상궤도를 벗어나는 걸 두려워하는데, 그게 없는 것 같다.

내가 인생의 진리로 생각하는 게 세 개가 있다. 첫째,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둘째, 시간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버스정류장에서 흘러가는 시간과 사랑하는 연인과 보내는 시간. 셋째, 그러므로 재밌게 살다 가자. 가급적 의미있는 시간들로 삶을 채우자. 그래서인지 늘 새로운 것에 설레고 미래보다는 현실에 충실한 편이다.
내가 세상과 연을 끊고 산장에 들어갔을 때 친구들은 다들 그랬다. “내가 너처럼 살고 싶은데…” 그럼 내가 이런다. “너 평생 그러고 살아, 그냥.” 그게 나와 일반인의 차이점 같다. 두려움을 깨지 않으면 다른 풍경에 서있을 수 없다. [오피니언타임스=박형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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