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진의 민낯칼럼]

인생은 60부터라는 구호는 물론, 인생 70이면 고래희(古來稀)라는 말조차도 민망해진 시대이긴 하지만, 무한경쟁의 지식정보산업사회에 돌입하면서 세대교체와 구조조정으로 60은커녕 50도 되기 전에 직장에서 쫓겨나는 판이니, 씩씩하고 건강해진 말년을 무엇으로 보내란 얘긴지, 요즘 세태가 아이러니하게만 느껴진다.

부강하거나 복지제도가 제대로 정착된 나라에서는 정년퇴직이든 명예퇴직이든 은퇴가 경사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반면 그렇지 않은 나라, 아직도 국민경제가 취약하고 미약한 나라에서의 정년퇴직은 개인이든 가정이든 조사(弔事)가 될 것이 분명하다. 일할 때 일하고 물러날 때 물러나는 것이 원칙이요,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충분히 일할 수 있는 사람을 몰아낸다는 데 있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연령으로만 체력이나 능력을 평가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노인들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포커스뉴스

이른바 KS(경기고-서울대) 출신의 MBA인 A씨는 대기업 임원을 지내다가 55세 때인 15년 전에 퇴직했다. 펄펄 뛸 나이였지만 어차피 임원이란 ‘임시직원’의 약자 아닌가. 그날부터 A씨는 집안에 틀어박혀 닥치는 대로 책을 읽거나 바둑 복기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고, 꼭 필요한 일 이외에는 외출조차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을 쳐박혀 살다보니 과거에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 임원을 지냈던들 실력이나 능력이 남아 있을 리도 없고 네트워크가 온전할 리 만무하다. 그나마 밥먹는 방법이나 잠에서 깨는 방법을 잊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의 큰 아들이 그즈음에 대학을 졸업했지만 취직을 하지 못했다. 빈둥빈둥 날마다 집에서 아비와 마주치니 얼마나 면목이 없었겠으며, 아비 또한 얼마나 민망했을까만 오직 자신만을 생각했던 아비는 그저 모른 체할 뿐이었다. 그런 나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드디어 아비는 빚독촉이나 하는 듯 싸늘한 눈초리로 아들을 째려보기 시작했다. 항상 모범생에 거칠 것이 없었던 아비의 생각으로는 자식의 빈둥댐을 참을 길이 없었던 것이다.

“야, 이놈아. 졸업한 지가 언젠데…. 언제까지 뒹굴대기만 할 거냐?”
“아무리 알아봐도 다닐 회사가 있어야지요.”
아들의 대답은 퉁명을 넘어 일전불사의 전투적인 말투였다.

“꼭 전공을 살려야만 하는 건 아니잖냐? 네 입에 맞는 떡만 찾으려 드니 그렇지.”
꾸짖는 아비에게 대답은커녕 아들은 역공을 취하듯 따지고 든다.

“그런데 아버지는 왜 놀고 계세요. 취직 좀 하시지.”
“(헉, 이놈이?) 내 나이가 이제 육십인데, 이제 취직이 다 뭐냐.”
“김대중 대통령 보세요. 80이 넘었는데도 직장이 있었잖아요. 아버진 아직 20년은 더 일할 수 있는데, 무슨 나이 탓을 하세요.”
“흠…, 그 양반은 특별하지….”
“특별하긴요. 칠십 넘어서까지 직장에 다니는 분들 많아요.”

아비는 말문이 막혔다, 대학교 2학년짜리 둘째 아들이 곁에서 한마디 더 한다. 말리는 시누이같은 자식이다.

“형은 아버지한테 무슨 말투가 그래. 흠흠…, 그런데 아버지, 제 친구 아버지는 아버지보다 더 늙었는데도 자동차공업사에 다니고, 골목 입구 아저씨도 물역가게 일을 하잖아요. 담배가게 아저씨도 보세요.”

아비는 얼굴이 벌겋게 닳아 올라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며 던지듯 말했다.
“알았다. 알았다…. 나를 누가 써주겠냐만 구멍가게를 하든 우유배달을 하든… 뭐든 하겠다.”

김구 선생은 나이 60에도 혁명운동을 했고, 이승만 박사는 73세에 대통령이 됐질 않았는가. 처질은 2차대전을 70세 때 겪었고, 그 후에 수상까지 하질 않았는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다보니 명퇴나 정년 문제를 차치하고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조로증(早老症)이 너무 심한게 아닌가 생각까지 들었다. 두어달 쯤 뒤 A씨는 취업을 했다.

대전 유성구에서 한 노인이 ‘실버 주차도우미’ 일을 하고 있다. ©유성구청

A씨의 직장은 예전 그의 직장을 생각하면 납득은커녕 상상조차도 안되는 곳이었다. 광화문 어느 빌딩의 주차 관리원이었다. 지하주차장과 지상주차장의 총 100여대를 관리하는 역할이었다. 차가 들어오면 수신호도 보내고, 대신 주차도 하고, 차가 나갈 때는 1000원이니, 3000원이니 주차료를 받는다. 어떤 때는 500원 때문에 얼굴 붉히고 마구 싸운다며 껄껄대고 웃었다.

물론 주차관리원을 자랑스럽다거나 썩 만족해 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 현실을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아주 건강해 보였다. A씨가 자식에게라도 당당하기 위해 일할 생각을 했었다는 것만으로 멋져 보였다. 그렇게 A씨는 6년간 주차관리원을 하다가 63세이던 2007년에 완전히 은퇴했다. 이번엔 번듯하게 자리잡은 자식들의 만류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정년퇴직이든 명예퇴직이든, 실직을 하게 되면 금방 얼굴색부터 변한다. 실직한 지 두어주일만 지나도 체중이 몇 kg씩 줄고 입맛도 없어진다고 한다. 어깨가 허수아비처럼 늘어지고 맥이 풀어진다. 대화를 나눈다 쳐도 모기소리로 앵앵댄다. 용기를 내라고 고무해봤자 아무 효과도 없다. 이러다가도 다시 일자리를 구하면 풀이 죽었던 사람이 힘차게 꿈틀댄다. 얼굴색이 발그레해지고 명랑해진다. 그러니까 실직 기간이 짧으면 몰라도, 만약 길어지거나 영영 실직상태가 된다면 말라죽거나 미쳐죽거나 쫓겨나 길에서 죽거나, 그럴 것이 아니겠는가.

정년퇴직한 사람들에겐 공통적으로 오는 병이 있는 듯하다. 퇴직한 후 오는 상실감과 무력감, 해이감과 심리적 좌절 때문에 병은 물론, 심한 경우 죽는 사람까지도 있다고 한다. '할 일도 없고 희망도 없는 인간이야말로 산송장'이란 얘기다. 일을 해야지만 늙지 않는다는 말이 만고의 진리라고 믿는다면 이 병을 이겨낼 것은 오직 일밖에는 없는 것이 아닌가.

젊은이들의 일자리도 없는 판에 정년퇴직자, 중늙은이들의 재취업 걱정을 얘기하는 것이 어쩌면 배부른 소리요, 잡소리가 될 수도 있지만 그 이름도 끔직한 ‘무한경쟁’ 소리만 말고 ‘나이가 들어도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많이 만들어’ 주는, 더 적극적이고도 지속적이고 본질적인 생산적 복지가 이룩되는 나라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피니언타임스=안희진]

 안희진

 한국DPI 국제위원·상임이사

 UN ESCAP 사회복지전문위원

 장애인복지신문 발행인 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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