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세진의 지구촌뒤안길]

미 백악관이 지난 10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오는 27일 일본 히로시마(廣島)를 방문할 것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이로써 지난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에 세계 최초로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 거의 71년 만에 미 현직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이 성사되게 됐다. 미국의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가 투하한 원자폭탄 '리틀 보이'는 히로시마에서 약 14만 명의 사망자를 낳았고 많은 사람들이 방사성 물질에 피폭돼 이후 오랜 세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사망자 중에는 한국인들도 약 2만 명이나 포함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31일 미국 워싱턴에서 오바마 미국 대통령(가운데), 아베 일본 총리와 핵안보정상회의를 한 뒤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게티이미지/포커스뉴스

원폭 투하 공과 논란 속 ‘핵 없는 세계’ 실현 다짐 재확인하려는 것

미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이 성사되기까지 71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것은 원자폭탄 투하가 갖는 의미가 세계사적으로 매우 크기 때문이다. 백악관이 공식 발표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 평화공원을 방문하지만 이것이 결코 원자폭탄 투하에 대한 사과나 사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 것도 그러한 원폭 투하가 세계사에서 갖는 의미를 둘러싸고 잘못된 해석을 부를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역사적 의미에 대한 해석이 어떠하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長崎)에 떨어진 두 발의 원자폭탄이 2차 세계대전의 종식을 앞당겨 더많은 전쟁 사망자 발생을 줄였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원폭 투하의 공(功)이다. 그러나 원폭 투하로 두 도시에서 20만 명이 넘게 사망하는 끔찍한 결과를 낳은 것 역시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원폭 투하의 과(過)로 남을 수밖에 없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공과 과 가운데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둘 것이냐는 점이다. 미국은 원폭 투하가 전쟁 종식을 앞당겨 더 많은 인명 피해를 방지했다는 쪽에 방점을 두고 있다. 반면 일본은 엄청난 인명 피해를 강조하며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발생해서는 안 되며 세계 유일의 원폭 피해국인 일본이 전후 평화 유지를 지켜야할 사명을 부여받았다며 평화국가로서 일본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데 열중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이 방문할 예정인 히로시마 평화공원에는 "우리는 이러한 사악한 짓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We shall not repeat this evil)라는 글이 쓰여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사악한 짓"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일본이 일으킨 전쟁을 뜻하는 것인지 아니면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를 말하는 것인지 애매모호하다.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것도 잘못이고 미국의 원폭 투하도 잘못이기에 둘 모두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은 이러한 모호함을 청산하고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시도라 할 수 있다. 그가 히로시마 방문을 결심한 것은 취임 직후인 2009년 초 프라하에서 선언했던 ‘핵없는 세계’ 실현에 대한 자신의 다짐을 재확인하고 북한의 핵 및 미사일 위협 속에 동북아 평화와 안정을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미·일 동맹을 확고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필요성 등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 목적에 관계없이 미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은 언젠가는 이뤄져야만 하는 것이다.

일본 히로시마 평화공원에서 지난해 8월 히로시마 원폭 투하 70주년을 맞아 시민들이 희생자들을 기리고 있다. ©게티이미지/포커스뉴스

평화국가 주창하며 우경화하는 일본, 전쟁 책임 잊어서는 안 돼

문제는 평화국가를 주창하는 일본이 정말로 변했느냐는 점이다. 아베 신조(安倍晉三) 일본 총리는 지난해 국민 대다수의 반대를 무시하고 일본이 국제무대에서 더 많은 군사적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는 안보 관련 법안을 강행 처리했다. 그는 또 새 역사 교과서를 통해 종군위안부 피해와 일본군 731부대의 생체실험 등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의 역사를 부인하며 이런 사실들을 덮어버리려는 역사 수정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이 일본에 면죄부만 안겨줄 것이라는 반발이 나오는 것은 당연할 것일 수 있다.

2차대전 종전 직후 미국은 전쟁 중 일본이 저지른 과오는 잘못된 지도자들의 과오이지, 일본 국민의 과오는 아니라며 지도자들만 처벌함으로써 일본 국민들의 죄책감을 덜어주었다. 점점 줄어들고는 있지만 전쟁 경험 세대가 아직 남아 있는 현재에는 일본 국민들 가운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죄책감이 상당 부분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일부 극우 보수 성향의 지도자들과 일본 국민들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정된 역사 교과서로 교육을 받는 미래 일본 세대들도 그런 죄책감을 가질 수 있을까? 자신들이 저지른 가해 사실은 애써 잊고 원폭 투하에 따른 피해만을 강조하려는 현 일본 지도자들의 행태에 비춰볼 때 이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같다.

일본이 그러한 죄책감을 잊지 않도록 끝없이 상기시키고 이를 통해 일본이 변화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본의 만행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위안부 소녀상이다. 미국 등지에 건립된 위안부기림비도 과거 일본의 만행을 증언하는 생생한 증거로 남을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일본이 저지른 위안부 피해를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해 일본의 역사 수정 시도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과거의 만행을 전세계가 똑바로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역사의 재발 방지를 위해서도 반드시 이러한 노력이 결과를 맺도록 해야만 한다.[오피니언타임스=유세진]

 유세진

 뉴시스 국제뉴스 담당 전문위원

 전 세계일보 해외논단 객원편집위원    

 전 서울신문 독일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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