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철의 석탑 그늘에서]

충청권이라면 당연히 충청남도와 충청북도를 아울러 이른다. 하지만 광주·전남과 전북의 정서가 같지 않듯 대전·충남과 충북도 각종 선거에서 일체감보다는 이질감을 드러낸 적이 적지 않다. 설명이 쉽지 않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그 이질감에는 근거가 없지 않다. 여권을 중심으로 ‘반기문 대망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고향은 충북 음성이다. 역사와 고고학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는 만큼 조금은 장황한 글이 될 것이다.

충북 옥천군 ‘이성산성’. ©옥천군청

충북 옥천·보은·음성 山城은 백제 겨냥했던 신라의 군사요새

충북 옥천의 이성산성(已城山城)은 지난해 발굴조사에서 5세기 신라시대 토성(土城)이라는 고고학적 증거가 드러났다. 굽다리 접시와 기와 조각을 비롯한 5세기 신라 유물이 여럿 출토된 것이다. 조사단은 해발 115~155m의 구릉에 자연지형을 따라 쌓은 이 산성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굴산성’(屈山城)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의 충북지역 일대를 배후로 백제로 가는 길목이라는 이성산성의 지정학적 위치도 판단에 한몫을 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마립간 8년조에는 ‘정월에 이찬 실죽을 장군으로 삼고, 일선 땅에서 3000명을 징발해 삼년·굴산의 두 성을 고쳐 쌓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소지왕 8년이라면 486년이다. ‘고쳐 쌓았다’는 것은 이미 존재하던 성이라는 뜻이다. 이전부터 있었던 이성산성과 삼년산성의 전략적 가치가 소지왕에 들어서면서 더욱 커졌음을 읽을 수 있다.

현존 한국 최고(最古)의 성으로 알려진 충북 보은군 ‘삼년산성’ ©보은군청

보은 삼년산성(三年山城)은 1980년대 발굴이 시작되면서 그 성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성산성이 토성이라면 삼년산성은 단단한 석성(石城)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석성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만큼 규모가 크고 오늘날의 기준으로도 매우 정교하다. 동서남북의 문터 4곳과 옹성(甕城) 7곳, 그리고 우물터 5곳이 발굴됐다. 신라 자비왕 13년(470) 축조됐다.

삼년산성과 이성산성은 한마디로 백제를 겨낭한 신라의 군사 요새다. 신라 진흥왕 15년(554) 백제 성왕이 전사한 곳도 굴산성에서 멀지 않은 옥천 관산성(管山城)이었다. 이후 신라의 백제 전선(戰線)은 옥천, 보은, 진천, 음성을 경계로 형성된다. 지난해 화제를 모은 경기 안성 도기동 목책성 유적도 한때 고구려가 사용했을 뿐 삼국시대 대부분 백제의 요새였다. 특히 신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장악한 이후 도기동 산성에 주둔한 백제군의 주적(主敵)은 차령산맥 넘어 음성과 진천 일대의 신라군이었을 것이다.

음성 수정산성의 추가 발굴조사도 올해 이루어진다. 수정산성은 2002년 축조 방식을 확인하는 시굴에 이어 2013년 성벽 구조의 변화 양상을 파악하는 발굴이 이어졌다. 올해는 성문터를 찾아내고 훼손된 성벽을 보수하는 조사를 벌인다. 수정산성은 지금까지의 출토 유물로만 보면 8~9세기 통일신라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성의 위치로 보면 통일신라시대 왜구의 영향도 크지 않은 내륙에 산성을 새로 쌓을 이유는 별로 없다. 신라군이 안성 도기동 일대 백제군과 대치하던 시대 초축(初築)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충청도 지도.  삼국시대 충주는 신라 제2의 도시로 백제 땅이었던 충남과는 DNA가 다르게 진화했을 수도 있다. ©네이버

충주도 신라 제2의 도시… 백제 땅이었던 충남과는 DNA 다를 수도

삼국시대 청주를 중심으로 하는 충북 서부가 이렇듯 백제와 접경을 이루고 있었다면 충주를 중심으로 하는 충북 동부는 아예 백제의 영향권 밖에 있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특히 충주는 중원경(中原京)이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명실상부한 신라 제2의 도시였다. 오늘날의 중원 지역이 백제 영향권이었던 시대는 삼국시대 초·중반 뿐이었다. 장수왕이 남진정책으로 충북 일대를 휩쓸고 ‘중원 고구려비’를 남긴 5세기에도 충주는 신라땅이었다.

내륙의 충주를 두고 삼국이 각축을 벌인 이유는 한강의 존재 때문이다. 결국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하고, 나아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도 남한강 상류 충주를 차지했기에 가능했다. 충주에 군사력을 집중하고 있던 신라는 지금의 서울 일대 한강 유역에서 고구려와 전투가 벌어졌을 때 수운(水運)을 이용해 신속하게 병력과 보급품을 투입할 수 있었다.

반면 고구려는 평양에 집중된 병력과 장비를 한강 일대에 배치하는 데 상대적으로 느릴 수 밖에 없는 육로를 이용해야 했다. 조선시대에도 충주 목계나루에서 마포까지는 이삼일이면 족했다고 한다. 상류인 충주에서 배를 띄우면 힘들여 노를 저을 필요조차 없었다.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기동력에서 앞선 신라가 언제나 승리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 배경에 충주가 있었다.

중요성이 엄청난 충주였으니 신라 사람들이 몰려와 살았다. 게다가 진흥왕은 통합한 대가야의 지배층을 대거 충주로 이주시켰다. 대가야 출신 우륵이 가야금을 뜯었다는 탄금대가 충주 남한강변에 남아 있는 이유다. 고구려가 점령한 시절에는 고구려 주민들도 충주에 집단 거주지를 형성했다. 세력이 결코 적지 않았다는 것은 충주 봉황리에 남아있는 고구려 양식 마애불이 증명한다.

1500년 안팎이나 지난 옛날 이야기다. 그럼에도 오늘날 충남과 충북이 같지 않은 정치적 선택을 하는 배경에는 삼국시대 다르게 진화한 DNA의 차이도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마음대로 생각해 본다. 충북 출신 반 총장은 대권 후보로 떠오를 수도 있고, 그냥 가라앉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든 이 과정에서 ‘충남 민심’의 향방을 지켜보는 것도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다.[오피니언타임스=서동철]

 서동철

 서울신문 수석논설위원

 문화재위원회 위원

 국립민속박물관 운영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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