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발언대]

1) “물가의 게임”

어렸을 때 가족들이랑 저녁을 먹고 있으면, 어버니와 아버지는 종종 일종의 ‘게임’ 비슷한 것을 하곤 하셨다. 그 게임이라 함은 지금 우리가 저녁 메뉴로 먹고 있는 것, 예를 들면 자반고등어 한 마리 등의 가격을 아버지가 맞춰 보는 것이었다. 이름을 붙이자면 ‘물가의 게임’ 비슷한 것이 되겠다.

아버지는 회계사였고, 회계사란 나름 경제와 경영에 빠삭한 직업이기에, 아버지가 그런 게임을 제안하는 것 자체는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아버지의 ‘찍기’가 정답에 전혀 근접하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그게 매번 반복된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물가의 게임’을 대체로 지곤 하셨다. 그것도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틀린 답을 찍으면서. 이 게임은 대체로 이런 패턴을 띠었다.

아버지이 고등어 한 마리 0000원!

어머니(단호) 택도 없어. 0000원이야. (아버지의 추측을 웃도는 금액이다)

아버지(반쯤 농담으로 황당해하며) 에이 무슨 고등어 한 마리가 뭐가 이렇게 비싸. 꼭 그렇게까지 줘야 돼? 좀더 싼 것도 있을 텐데 그런 걸로 안 차리고.

어머니(여전히 단호) 당연히 더 싼 것도 있지. 하지만 먹을 만한 건 다 이만큼 해.

그때 나는 이 게임이 그런 양상으로 흘러가는 것이 조금 이상하고, 때로는 불쾌한 부분도 있다고 생각했다. 불쾌함의 원인은 간단하다. 그 게임의 광경은, 제3자가 보면, ‘함부로 막말하는’ 대화로 비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 전문가’인 아버지가 어떻게 저렇게 물정 모르는 소리를 당당하게 할 수 있는 걸까. 슈퍼에 두부 사러 심부름 다녀오는 게 경제활동의 전부인 초등학교 4학년의 내가 더 잘 맞출 것 같은데.

©픽사베이

2) 삶의 최저선을 논의하고 결정하기

어느 날인가, “더 싼 거 사서 먹지”를 되풀이하는 아버지의 레파토리가 신경 쓰여서 어머니께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정말 더 싼 게 있긴 있어요? 어머니께서는 부인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이어서, 그건 ‘먹을 만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나는 거기서 ‘왜요? 위생적으로나 물리적으로 못 먹는 건 아니잖아요?’라고 되묻지 않았다. 그런 뜻의 말씀이 아니었으니까.

다만, 당신 스스로 보시기에 그 아래 가격대의 물품들이란 가격과 품질 사이에서 ‘싼 가격’을 맞추는 데에만 급급한 물건이라는 뜻이었고, 값싸다는 이유로 그 따위 ‘싸구려’를 사 먹느니 돈을 더 주고라도 조금 더 나은 것을 먹고 살겠단 말씀이셨을 것이다. 말하자면, 스스로 설정한 가계 품위의 최저선은 지키고 싶단 얘기였을 것이다.

세상에 싼 것은 많다. 두부만 해도 한 모에 4천 원을 부르는 것에서부터 1천 원이 채 못 되는 것까지 다양하니까. 예컨대 식사 한 끼에 몇만 원을 넘게 쓸 수도 있겠지만, 편의점에서 ‘칼로리 밸런스’ 하나와 ‘포카리 스웨트’로도 한 끼 영양분 자체는 충분하다. 월세며 그밖의 부분은 어떤가? ‘최저 수준의 집’을 찾아 내려가자면 월 16만원짜리 고시원도 있고, 종일 걸어다니면 교통비를 0원으로 만들 수도 있고, 모든 옷을 기증받아 입는다면 피복비도 없앨 수 있겠다.

그렇게 모든 것을 최저로 맞춰 산다면, 매달 50만원 이내의 돈으로도 살 수는 있다.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으며, 위생적으로나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은 생활이다. 그러나, 다만 그뿐이다. 누구도 그런 삶을 ‘살 만한 삶’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 정도의 의지력과 세상 물정이 있다면, 누구나 자기 생활의 최저선은 그보다 더 위의 어딘가에 긋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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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위원회가 해야 할 일은 둘 중 무엇일까

아직 진행 중인 최저임금위원회에서 경영계가 ‘미혼 단신 근로자 한 달 생활비 103만원으로 충분’ 어쩌고 하는 주장을 했다고 한다. 백보 양보해서, 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겠다. 그리고 불가능하든 어떻든, 무슨 주장을 펴는 건 얼마든지 용납할 수 있다고 치자. 대한민국은 누구든지 아무 소리나 할 수 있게 언론의 자유, 사상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 주장을 어떤 사람이 어떤 장소에서 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게임’일 수도 있지만 삶의 수준을 무시하는 심각한 실언(失言)일 수도 있다. 일단 우리 집 식탁의 ‘물가 맞추기 게임’은, “뭐가 그렇게 비싸? 좀 싼 거 쓰지” 하는 아버지의 불평과 별개로, 애초에 틀릴 수밖에 없는 게임이었고 사실 틀려도 별 문제 없는 일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버지가 시장 가격을 알 턱이 없다는 전제가, 모두에게 너무나 명백했기 때문이다.

남편-아내의 고전적 성역할 이분법 하에, 아버지는 직장인으로서의 의무인 야근과 특근과 주말 잔업을 충실히 이행했고, 어머니는 집안 살림꾼으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가지고 계셨다. 상황이 이랬기에, 아버지가 부르는 “고등어 한 마리 0000원”은 진짜로 순수한 짐작일 뿐이었지, 그 가격 수준에 무조건 맞추라는 압박이나 집안 살림에 대한 시비 걸기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황당한 오답과 불평은, 별다른 현실적 효력 없이 게임으로 시작해서 게임으로 끝날 수 있었다.

지난달 25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린 ‘민주노총 전국노동자대회’ 참석자들이 최저임금 1만원을 촉구하며 행진하고 있다. ©포커스뉴스

하지만, 경영계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가장 낮은 수준의 살 만한 삶”이 뭔지, 그것을 보장하려면 그들이 최소한 얼마를 줘야 하는지를 논하는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 그건 결국 그 가격 수준에 맞춰 살라는 압박일 뿐만 아니라, 애초에 그 103만원의 삶이란 게 ‘살 만한’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 이 사실이 와닿지 않는 분들을 위해, ‘게임’이었던 우리 집 식탁의 대화로 바꿔 말해 본다. 누군가의 삶에 대해 진짜로 함부로 말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경영주이 근로자 한 명 000만원!

노동계(단호) 택도 없습니다. 못 해도 000만원입니다.

경영주(반쯤 농담으로 황당해하며) 에이 무슨 노동자 한 명 월급이 뭐가 이렇게 비싸. 꼭 그렇게까지 줘야 돼? 한 103만원 정도 하는 더 싼 것도 있을 텐데 그런 걸로 데려다가 안 시키고.

 

 안학수

 Twenties' Timeline 피처 에디터. 대학생입니다. 집에도 가고 싶고 취직도 하고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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