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희의 꼼꼼세설]

“정말 돈이면 다 되는 거니?” OCN 드라마 ‘38사기동대’에서 세무공무원 백성일 과장(마동석)은 사기꾼 양정도(서인국)에게 이렇게 묻는다. ‘38사기동대’는 고지식하던 세무공무원이 돈으로 윗선을 주무르고 못된 짓을 일삼는 악덕 세금체납자에게 사기를 쳐 세금을 받아낸다는 내용의 드라마다. 법 위에서 큰소리치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케이블TV 드라마인데도 평균시청률 4%를 넘기고 있는 히트작이다.

백성일 과장뿐이랴. 우리 모두 묻고 싶다. “정말 돈이면 다 되는 거니?” “정말 든든한 줄만 있으면, 힘 쓰는 자리에만 있으면 다 되는 거니?” 믿고 싶지 않지만 그런 일이 수시로 있는 모양이다. 홍기택 전 산업은행 회장이나 나향욱 교육부 정책기획관을 보면 그렇다.

홍기택 전 산업은행 회장. ©포커스뉴스

홍기택 전 산업은행 회장은 박근혜 정부의 최대 수혜자다. 대통령과 가깝다는 이유로 평범한 대학교수에서 하루 아침에 118개 자회사를 거느린 국책은행 수장이 됐다. 그것도 모자라 산업은행 재직 시 자회사인 대우조선해양의 수조원 대 부실을 방치하고도 처벌받기는커녕 연봉 5억원대 국제금융기관인 AIIB(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부총재로 부임했다. AIIB측에서 복수 추천을 요구했는데도 단수 추천을 하고, 면접 후 AIIB측에서 난색을 표명했는데도 우리 정부가 밀어붙였다고 한다. 4조3000억원을 투자한 대가로 마련해준 자리다.

승승장구하다 보면 자신의 힘을 과신하게 되는 걸까. 산은의 대우조선 부실에 대한 책임이 불거지자 그는 서별관회의 운운하며 “지난해 대우조선 지원은 청와대·기획재정부·금융당국이 결정한 사안이다. 산업은행은 들러리 역할만 했다”고 폭로했다. 국민을 우습게 안 건 물론 자신을 특별대우해준 이에 대한 최소한의 의리도, 전 국책은행 회장으로서의 자존심도 내팽개친 셈이다. 그리곤 AIIB에 휴직계를 내고 잠적, 4조3000억원짜리 자리를 날렸다.

그는 산업은행 회장 시절 “교수로 재직했을 때보다 연봉도 적다.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자리인 줄 알았으면 안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2012∼2014년 한국산업은행장 평균연봉은 4억4661만원으로 대통령 연봉(2억1210만 원)의 두 배가 넘었다. 3년간 성과급만 3억5000만원이었다. 대학교수 봉급이 그렇게 많았을 리는 없고, 사외이사 등 교수 직함을 내건 바깥 활동으로 번 돈이었을 것이다.

홍 전 회장의 부인은 서강대 교수로 신한금융지주 이사회 의장을 지낸 전성빈씨다. 홍 전 회장의 교수 시절 연봉이 산은 회장 연봉보다 많았다니 부부 수입을 합치면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떵떵거리고 살았을 텐데도 권한과 책임 모두 막중한 산은 회장 자리를 탐냈다가 “힘만 들고 돈도 안 된다”고 투덜댔던 셈이다. 명색이 경제학자이니 우리나라 직장인 37.3%가 연봉 2000만원 미만이고, 체감 청년실업률이 34%에 이른다는 사실을 알 법도 한데 그렇게 말한 걸 보면 그는 자신은 천상계, 이 땅 99% 국민은 지하계 사람이라고 여긴 듯하다.

나향욱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이 11일 국회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포커스뉴스

국민을 우습게 안 걸로 치면 나향욱 교육부 정책기획관이 끝판왕에 가깝다. 술김이었다고 해도 공무원이 “(99%의) 민중은 개·돼지로 취급하면 된다", "신분제를 공고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는 데엔 숨이 턱 막힌다. 국회에 나와 “술에 취해 죽을 죄를 지었다”고 사과했다지만 동석했던 기자는 방송에서 “그렇게 만취 상태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영화 ‘내부자들’의 악역 이강희 주간(백윤식)은 이렇게 말한다. “어차피 대중들은 개·돼지입니다. 뭐 하러 개·돼지들이 짖는 소리에 반응하십니까? 적당히 짖어대다가 알아서 조용해질 겁니다.” ‘38사기동대’에서 마진석(오대환)은 57억7000만원의 세금을 체납하고도 큰소리친다. “평등 이게 좋은 게 아닌 건데 정말. 멍청한 사람들이, 진짜 격 떨어지게."

마진석의 보스로 500억원의 세금을 안 내고도 떵떵거리며 오히려 공무원을 협박하는 방필규(김홍파)의 대사는 뻔뻔함의 극치다. “동정심이랑 권리를 착각하지마! 너희들이 권리라고 생각하는 거, 그거 다 우리 동정심에서 나온 거야. 너희들이 먹고 싸고 자고 입고 쓰고 그럴 수 있는 거… 다 나같은 사람이 너희들에게 동정심으로 베푼 거라고, 그러니까 국민의 의무니 뭐니 그딴 거 나한테 지껄이지 마, 나 국가에 의무 없어, 국가가 나한테 의무 있지.”

홍기택 전 회장과 나향욱 정책기획관의 행동을 보며 이강희와 방필규의 대사가 허구같지 않은 건 참담하다. 산업은행과 대우조선해양에서 홍 전 회장 못지않은, 어쩌면 더 많은 연봉을 받고도 ‘지나갔다’는 이유로 발 뻗고 자면서 또 다른 이권에 눈독 들이는 이들이 수두룩하다는 사실, 중책을 맡고도 “경제적으론 손해”라는 말하는 이들이 홍 전 회장 말고도 많다는 사실, 공적자금이 들어간 은행이라는 이유로 고객사은품과 기부금엔 인색하면서 회장 연봉은 다른 곳보다 더 챙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성폭행을 “도둑질도 아닌데 뭘” 하거나 위안부할머니들에 대해 “돈 받고 갔으면서”라고 말하는 이가 우리 사회 최고의 지식층이자 지도층 행세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오피니언타임스=박성희]

 박성희

  전 한국경제신문 수석논설위원

  한국외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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