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철의 석탑 그늘에서]

회사 동료들과 냉면집을 찾을 때면 장난삼아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한다. “냉면이 어느 계절 음식인지 아느냐”고…. 시인 백석의 표현처럼 ’슴슴한’ 평양식 냉면이 익숙치 않은 사람들이라면 의아해하며 십중팔구는 곧바로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 ‘당연히 여름음식일 텐데 굳이 묻는 이유가 있겠지’하며 슬금슬금 눈치를 살핀다. 간혹 “냉면은 추운 밤 뜨끈한 방에 앉아 시원하게 먹는 맛이 최고”라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사람은 “겨울이 아니냐”며 동의를 구하기도 한다.

©플리커

‘겨울음식’ 냉면의 추억

그렇다. 냉면은 겨울음식이다. 초등학생들은 잘 맞추지만 학력이 높을수록 생각만 많다. 냉면이 겨울음식인 이유는 싱겁게도 ‘옛날에는 냉장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름처럼 차가운 국수를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계절은 겨울이었다. 물론 “왕조시대에도 빙고(氷庫), 즉 얼음창고가 있었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빙고에 보관된 얼음은 왕실의 제사 때 쓰거나 여름에 왕실종친과 대신들에게 한 두 덩이를 나눠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선친이 냉면광(狂)이었던 탓에 대여섯 살 무렵부터 이 음식을 아주 좋아하게 됐다. 당시 우리집의 외식(外食) 메뉴는 두 가지 뿐이었다. 평양식 냉면을 제대로 만드는 집에 갈 수 있을 때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당연히 냉면이었고, 그런 집이 가까이에 없을 때 대안이 짜장면이었다.

어느 날 이버지는 눌러서 면을 뽑는 냉면기계를 딸딸이 삼륜 용달차에 싣고 와 어머니를 놀라게 했다. 이후 온식구가 이 기계에 매달려 몇 달 동안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봤지만 제대로 된 냉면은 커녕 냉면 비슷한 것도 맛볼 수 없었고, 결국 냉면기계는 고철로 팔려가는 신세가 됐다. 지금도 냉면을 제대로 만드는 가게에 존경을 아끼지 않고, 호된 가격표라도 수긍하는 것은 당시의 이런 기억 때문이다.

요즘 가정식 제면기는 버튼만 누르면 면이 나온다. ©네이버쇼핑

일본 일간지 음식 담당 기자들, 한국 냉면의 맛과 독창성에 놀라

일본의 일간신문 음식담당 기자 두 사람에게 서울의 민속신앙과 음식문화를 안내할 기회가 있었다. 서울 곳곳의 음식점을 순례하고 돌아가는 길, 두 사람이 가장 맛있게 먹은 음식으로 꼽은 것은 뜻밖에 냉면이었다. 일본은 ‘소바’라고 부르는 메밀국수의 본산이다. 메밀국수를 세계 시장에 퍼뜨린 것도 일본이라고 봐야 한다. 냉면은 국물이 있는 메밀국수라는 ‘소바’의 정체성과 가장 가까운 한국음식일 것이다.

두 사람을 데려간 곳은 을지면옥이었다. 상대적으로 도시화가 덜 이루어진 평양냉면의 맛을 고수하는 집이다. 두 사람은 커다란 스테인레스 그릇에 담긴 냉면이 나오자 긴장하기 시작했다. 맑은 육수에 잠긴 메밀국수라는 조합은 아마도 평생 처음 보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들은 마지막 한방울의 육수까지 깨끗하게 비웠다. 그리고는 “이런 형태의 메밀국수가 있다는 것에 놀랐다”고 했다. 그리고는 “이 집이 도쿄에 분점을 내면 일본 사람들이 줄을 설 것”이라고 장담했다. 한국 음식문화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냉면은 세계적으로도 각광받을 것이라고도 했던 것 같다.

일본 소바보다 냉면이 한수 위? ©플리커

젊은이들 사이에도 평양 냉면 바람… 섬세한 맛에 눈뜬 결과

이렇듯 냉면은 한국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음식이지만, 세계 시장에서는 독특한 지위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 외국인들에게 한국 음식을 상징하는 대표적 단어를 들라고 하면 김치의 ‘붉은색’이나 간장 된장 고추장의 ‘발효’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가장 즐기는 음식인 빈대떡과 냉면에는 이 두가지가 전혀 없다. 그렇다고 정체성이 결여된 한국 음식이라고 말하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다.

냉면의 세계화 가능성은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서구화된 입맛에 길들여진 젊은 세대 사이에서 요즘 평양 냉면 바람이 불고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유수한 냉면집의 손님은 지팡이를 짚은 백발의 이북 출신 피난민이 주류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르신 세대보다 젊은이들의 숫자가 훨씬 많은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여름휴가로 ‘충청·경상도로 떠나는 평양냉면 명가 기행’ 같은 신문 기사를 오려들고 냉면 순례를 떠나는 젊은이조차 적지 않다. TV만 켜면 음식 스토리가 나오는 미식 열풍의 시대 입맛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섬세한 냉면 맛에도 눈뜨기 시작한 결과일 것이다.

기억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지난해 밀라노 엑스포의 주제는 음식이었다. 장독을 앞세운 한국관은 ‘슬로푸드의 대명사인 발효 음식은 땅의 생명력과 태양의 에너지까지 흡수하며 익은 과학의 산물’이라는 컨셉트로 꾸며졌다. 전시 콘텐츠도 나쁘지 않았고, 실제로 한국 음식 문화를 처음 접하는 유럽인이라면 흥미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음식 문화를 배우는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해 밀라노 엑스포를 찾았던 필자에게는 ‘한국의 음식 문화가 과연 이것뿐인가’하는 작은 회의도 없지 않았다.

한식 세계화를 위해서는 ‘한국음식=김치’라는 틀에서 벗어나 다양한 음식을 세계 시장에 선보여야 한다. ©픽사베이

김치와 장류뿐 아니라 냉면으로 세계에 우리 음식문화의 다양성 알려야

우리 음식 문화의 해외 진출 초기에는 가장 대중적인 이미지를 가진 재료를 들고 나가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음식에 대한 정보와 지식, 나아가 맛은 이미 식도락 선진국을 자처하는 나라의 전문가나 미식가 사이에는 널리 퍼져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한국을 대표하는 맛으로 김치와 장류를 내세우는 것은 우리가 가진 음식 문화의 다양성을 우리 스스로 훼손하는 것과 다름없지 않나 싶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햇살이 몹시 따가웠던 밀라노에서 간절하게 떠올린 것이 바로 냉면이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세계 각국의 음식 문화를 한 자리에 모아 비교하는 자리는 언제건 다시 마련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과감하게 김치와 장류를 포기해 보자고 음식 문화 정책 부처에 당부하고 싶다. 붉은 색도, 발효도 없는 한국 음식의 경지를 세계 시장에 보여주자는 것이다. 이런 음식의 양상을 점검해 보는 박람회를 먼저 열어봐도 좋겠다. 우리 음식 문화의 다양성을 되찾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김치와 간장 고추장 된장이 익어가는 장독대는 분명 한국의 자연주의적 음식 문화를 상징하는 소중한 문화적 자산이다. 그럴수록 장독대의 힘을 빌지 않아도 또 다른 성찬을 얼마든지 차려낼 수 있는 음식 문화의 다양성을 이제부터라도 세계와 공유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음식 문화의 풍요로움을 충분히 즐기고 있으면서 굳이 외국인에게는 비밀에 부쳐야 할 이유가 있는가. 글을 마무리 지었으니 이제 냉면을 먹으러 가야겠다.[오피니언타임스=서동철]

 서동철

 서울신문 수석논설위원

 문화재위원회 위원

 국립민속박물관 운영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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