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 위에서 쓰는 편지]

벌써 2년 가까이 지난 ‘옛 이야기’가 됐습니다. 신문사에서 퇴직하고 소위 프리랜서 작가가 된 뒤, 처음 맡게 된 일이 경상북도 지역을 다니며 취재를 하고 책을 한 권 쓰는 것이었습니다. 거의 가본 적 없는 낯선 도시를 찾아가 낯선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고 사진을 찍는 건 제법 고된 과정이었습니다.

지난 4월22일 어버이연합 사무실에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사진이 걸려 있다. 어버이연합은 이날 ‘전경련 자금지원 의혹’과 관련 기자회견을 열었다. ©포커스뉴스

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마음 보여준 흑백사진

어느 도시였는지 정확한 기억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길을 가다 잠시 차를 세우고 물을 사기 위해 길 옆 가게에 들렀을 때입니다. 가게 문을 열자마자 시선이 자연스럽게 벽에 가 닿고 말았습니다. 그곳에는 오래전 고인이 된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었습니다. 고(故) 박정희 대통령이었습니다. 벽에 걸린 사진은 익숙하고도 낯선 풍경이었습니다. 익숙하다는 것은 그가 대통령이었던 시절에는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었던 사진이기 때문이고, 낯설다는 것은 그런 풍경을 본지가 너무 오래됐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를 화석처럼 품고 있는 흑백사진 한 장이 시간의 강을 단숨에 건네줬습니다. 그가 이 나라를 통치하던 시절이 엊그제인양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모든 감정이 탈색된 눈길로 세월을 거슬러 오르다, 오래지 않아 가게를 나왔습니다. 저와 달리, 사진 속 인물과 가게의 주인 사이에는 질긴 끈 하나가 이어져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바라보고 먼지를 털어내는 만큼의…. ‘옳다’ ‘그르다’ 판단을 할 이유도 없고, 그런 ‘관계’에 반감 같은 것은 더욱 없었습니다. 나와는 멀리 떨어진 세상인 듯 생경한 가운데, 그곳 사람들이 간직하고 있는 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마음을 잠시 엿봤을 뿐입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뒤, 조금 ‘특별한’ 사진에 시선을 빼앗겼습니다. 경북 성주군 선남면 성원1리 주민들이, 마을회관에 걸어두었던 박근혜 대통령의 대형 사진을 철거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경북 성주군민 2000여명이 21일 서울역 광장에서 사드 배치 반대를 요구하는 상경집회를 하고 있다. ©포커스뉴스

사드 배치 반대 성주 주민들, 박근혜 대통령 사진 철거

성주가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지로 결정된 이후 지역 주민들의 거센 반발을 상징하는 장면이었지요. 사드를 배치하기로 한 야산과 1㎞가량 떨어져 있는 성원1리는 고령 박씨 집성촌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선조 묘가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 사진을 걸 때는 대통령을 배출했다는 자부심이 대단했겠지요. 그 순간, 사진을 내리는 장면 위에 2년 전 가게에서 보았던 사진이 오버랩 됐습니다. 고 박정희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이 부녀간이라는 것 말고도 참 많은 사연이 얽혀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진을 거는 마음과 내리는 마음 사이의 거리는 얼마만큼 일까 상상도 해봤습니다.

물론 사진을 내린 배경은 엄청난 분노와 배신감이겠지요. ‘절대적으로 지지했는데 이럴 수가 있어?’하는 심정 말입니다. 그런 배신감은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도 곧잘 격렬한 행동으로 표출되고는 하지요. 상황에 따라서는 목숨이 오가기도 합니다. 지지나 사랑이 맹목적이었을 때는 그 강도가 더욱 증폭됩니다.

사드 배치와 관련해서 대구·경북, 부산·경남에서 느끼는 배신감은 수치로 확인되기도 했습니다. 성주 배치 결정 직후에 실시한 ‘박근혜 대통령 국정수행 평가’ 여론조사를 보면 긍정 33.8%, 부정 59.2%로 나타났습니다. 사드 배치 발표 직전의 조사결과는 긍정이 36.6%로 비교적 강세였습니다. 내용을 세세히 들여다보면 영남권에서 지지층이 크게 이탈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두 장의 사진 때문에 시작한 이야기가 제법 길어졌습니다. 제 이야기 속에 사드 자체는 없습니다. 새삼스럽게 ‘내 뒷마당에는 안 된다’는 님비(NIMBY) 현상을 거론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언급하지 않아도 다양한 목소리가 넘쳐나니까요. 전문가도 많고요. 다만 저는 혼자 꾸는 꿈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런 상황과 반응이 향후 민의의 향방에 긍정적인 결과로 나타났으면 좋겠다는 꿈입니다. 살다보면 엉뚱한 계기가 좋은 결과를 낳는 경우도 없지 않으니까요.

20대 국회의원선거 당선자 현황. 지역별로 한 정당이 ‘싹쓸이’한 모습이다. 무조건 1번, 2번만 찍는 맹목적 지지는 유권자 스스로 권익을 팽개치는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포커스뉴스

지역구도 변화의 단초 될까… 맹목적 지지는 스스로 권익을 팽개치는 것

‘망국적’이라고 표현되는 지역분할 구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까지야 바라지 않지만, 변화의 단초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은 버릴 수 없습니다. 즉, “나라를 팔아먹어도 찍겠다”는 맹목적 지지가 얼마나 허무한지 제대로 깨달아서 향후 투표에 반영되면 좋겠다는 뜻이지요. 그런 변화는 당연히 호남권을 포함한 다른 지역에서도 나타나야합니다. 반면교사만큼 좋은 스승도 없으니까요.

얼마 전 한 신문이 창간기념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지지정당이 없다는 소위 ‘무당층’이 31.2%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2015년 말보다 5.9%P나 상승한 수치라고 합니다. 신문은 이 같은 결과를 정치 혐오 탓으로 분석했습니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 정치가 사랑받은 적이 있던가요? 저는 그 역시 지역구도가 희석된 결과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물론 정치 문외한인 저 혼자만의 소망일 수도 있겠지요.

그런 제 소망에는 절박감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제는 국민 스스로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정지가 아닌 퇴보입니다. 자주 정치인을 손가락질하지만, 먼저 바뀌어야 하는 것은 유권자입니다. 경상도 사람이라는 이유로, 전라도 사람이라는 이유로, 충청도 사람이라는 이유로 특정인에게 몰표를 주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권익을 내팽개치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정치인들은 확실한 텃밭에 물을 주는 데 인색하기 때문입니다. ‘배신’을 당하지 않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연고’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똑바로’ 찍는 것입니다.[오피니언타임스=이호준]

 이호준

 시인·여행작가·에세이스트 

 저서 <자작나무 숲으로 간 당신에게>, <문명의 고향 티크리스 강을 걷다>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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