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미의 집에서 거리에서]

지난 토요일, 푹푹 찌는 폭염에도 불구하고 친구들과의 등산모임은 거르지 않았다. 여학교 동창 10여명이 매주 토요일 오전 9시에 만나 점심 무렵까지 3시간여 등산과 산책 그 중간 정도 난이도의 둘레길을 정기적으로 걷고 있다. 각기 집, 직장에서 종종걸음으로 여유 없이 살다가 여고 졸업 30년 후, 나이 쉰즈음 재상봉해 운동 삼아 만나온 지도 10년이 넘는다.

산행 중 땀을 식히며 한담을 나누던 쉼터에서 한 친구가 말을 건넸다. “과거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느 시절로 가고 싶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와 미래로 시간여행을 하는 추억의 헐리우드영화 ‘백 투 더 퓨처’도 아니고, 불쑥 무슨 소리냐고 되물으면서도 일행은 너나없이 내심 자문자답이라도 하는 듯 진지해졌다.

영화 '백 투더 퓨쳐'의 한 장면. ©네이버 영화

늘 에너지 넘치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일궈오고 있는 몇몇 친구가 말했다. “글쎄. 그닥 과거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아. 오히려 나를 짓누르던 책임감과 의무감에서 벗어나 여유 있게 또 나답게 내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요즘이 좋아.”

“무언가 배우고 미래를 꿈꾸던 젊은 날, 학창시절도 좋았어. 그러나 가정 안팎에서 나를 비중있게 생각할 수 있게 된 지금이 제일 행복해. 젊은 그때가 인스턴트의 단맛이라면 나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는 지금은 농익은 발효의 맛 같다고 할까.”

지난날을 더할 나위 없이 열심히 살았든 혹은 너무 힘들었던 나머지 돌이켜 보기조차 싫든, 이미 흘러가 버린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현재에 충실하고 만족하는 삶의 태도가 좋아 보였다.

평소 ‘오래된 것은 좋은 것’이라고 여기는 회고적 성향의 나 자신도 그 순간 되돌아가고픈 ‘그 때 그 시절’이 선듯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꿈꿀 수 있던 젊은 날, 소중한 만남과 보람, 가정과 일에서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이 없을 리 없다. 그럼에도 ‘참 좋았던 시절’로 추억할 뿐 되풀이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이 들고 가족과 일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일상의 여유, 스스로를 즐기게 된 행복을 말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노철학자의 말씀이 떠올랐다.

1920년생, 올해 96세 나이에도 강연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최근 출간된 저서 ‘백년을 살아 보니’에서 “인생의 황금기는 60세에서 75세인 것 같다”고 했다. 그 무렵 생각이 깊어지고, 행복이 무엇인지,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된다는 이야기다. 또한 그런 노년기의 지혜는 결코 그냥 주어지는 건 아니며 청년기나 장년기에 일찌감치 자신이 노년기의 원하는 삶을 그려보고 신념과 용기를 갖고 계획해야 한다고 장수시대에 즈음해 행복한 노년기를 위한 준비를 일깨웠다.

©픽사베이

1924년생인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도 칠순 무렵 여성앵커 바바라 월터즈와의 특별인터뷰에서 “흥미진진하고 도전적인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최고의 순간은 언제였느냐”는 물음에 “지금이 최고인 것 같다”고 했다. 카터 전 미국대통령은 그 이유로 “깊이 생각할 수 있고 가족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으며 이전에 저지른 잘못을 고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나이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를 설명하는 시도의 하나”라며 집필한 저서 ‘나이드는 것의 미덕’을 통해 70대에 새로운 것을 배우고, 나이 들어서도 다른 사람을 위해 무언가 하는 적극적인 노년을 강조했다.

인생에 대한 경험과 성찰이 넓고 깊은 원로들과 같은 선에서 내 인생을 가름할 수는 없겠지만 퇴직 후 물리적인 나이를 의식하며 움추러든 나로서는 나이 듦의 의미를 새삼 생각해보게 됐다.

청춘의 정열과 이상을 묘사한 민태원의 수필 ‘청춘예찬’을 뒤로 하며, “나이 들면 젊을 때 미처 못 보고 못 듣던 것까지 두루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다”는 ‘노년찬가’에 다가서고 있는 이즈음. 문득 생각해 본다. 과연 내가 나이 듦을 예찬할 수 있을 만큼 잘 살아왔고 또 살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신세미

 전 문화일보 문화부장.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후 조선일보와 문화일보에서 기자로 35년여 미술 공연 여성 생활 등 문화 분야를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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