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대 철학과 사회철학반]

‘무엇이 무겁단 말인가? 짐 깨나 지는 정신은 그렇게 묻고는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짐이 가득 실리기를 바란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철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당연해서 의심조차 들지 않는 것에 ‘그것이 정말 그러한가?’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 철학의 목적이다. 스스로는 아무 결정도 할 수 없었던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의 모든 핵심적 권한들을 최순실에게 위임하였다. 지금 국민의 모든 분노는 최씨를, 그리고 박 대통령을 향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무엇 때문에 분노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분노의 화살은 올바르게 향하고 있을까?

박근혜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 등이 지난해 8월15일 열린 제70주년 광복절 중앙경축식에서 만세를 부르고 있다. ©청와대

이명박과 박근혜는 우리가 직접 만든 대통령이다. 그들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겠다고, 잘 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들이 정의하는 잘 사는 것은 곧 ‘부자’가 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우리는 그들을 선택하였고, 이는 곧 ‘부자가 되는 것= 잘 사는 것’에 동의한 것이다. 그들을 지지한 당신 또한 ‘부자가 되는 것, 풍요로운 삶 = 잘 사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는 성공을 목표로 살아간다. 공무원이 되기를, 안정적 직장을 갖기를 꿈꾸고 우리의 자식들과 친구들에게 성공신화를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시대의 성공한 자들을 보라. 무당의 말을 받아 적고 있던 청와대 엘리트 행정관료들을 보라. 부자가 되고, 성공하는 것이 정말로 잘 사는 것일까? 우리는 무엇을 꿈꾸고 있나? 어떻게 살고 싶은가? 우리의 그 대단한 꿈, 청춘,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가?

9급 소방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박모 군이 지난달 28일 카페 아르바이트 중 휴식을 취하고 있다. ©포커스뉴스

또 다른 구세주를 기다리지 말자

누군가는 이 혼란한 시국을 해결하기 위해 정치적 결단으로서 거국중립내각을, 또 어떤 이는 다음 대선 주자를 애타게 기다린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스스로에게 질문하지 않았으며, 우리의 삶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새로 나타난 인물들이 만약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 한다면. 오늘의 절망적 현실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좌절과 분노를 되풀이하고, 또 다른 구세주를 기다릴 것인가. 이렇듯 우리는 언제나 구원자를 기다려왔다. 우리는 훌륭한 구원자가 선택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하기보다, 구세주를 선택하는 것을 ‘자유’라고 말한다.

이렇게 우리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보다,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훌륭한’ 인물들에게 삶을 맡겨왔다. 묻고 싶다. 지금 우리에게 남아있는 ‘자유’는 무엇인지. 여전히 우리는 대단한 자유를 가졌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남은 자유란, 어떤 기업에 들어가든지 정년을 채우지도 못하고 희망퇴직을 당해 치킨집을 차릴지 고민할 자유거나, 비정규직으로 내일의 불안을 견뎌내며 어떤 컵라면을 먹을지 선택할 자유, 공무원시험을 준비할지 어떤 스펙을 쌓을지 고민할 자유들이 남아 있을 뿐이다.

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2차 촛불집회에 교복 입은 학생들이 참석해 촛불을 밝히고 있다. ©포커스뉴스

초라한 욕망이 만들어낸 현실

지금 우리에게는 ‘일단 먹고 살아야지’라는 명분 아래 금전적 성공과 안정적 삶만이 유일한 목표로 남아있다.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하며 탐욕과 욕망으로 자신을 몰아가는, 스스로 노예가 될 수 있는 자유밖에 남아 있는 건 아닌지 모른다. 스피노자는 “정념에 이끌리고, 정념에 예속되는 삶은 노예의 삶”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물질적 욕망에서 기인한 우리가 가진 자유라는 것도 자유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욕망을 통한 자유가 아닌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일상 속에서 욕망을 통해서만 자유를 느끼고, 그 욕망을 방해하는 사소한 일상의 것들에 분노하고 있다. 카드를 거절하고 현금지불을 요청하는 업주에게, 퉁명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편의점 알바생에게, 노약자석에 앉아있는 젊은이에게, 자꾸만 비싸지는 물가에, 성심껏 써낸 자소서가 휴지조각이 되는 것에. 이제부터라도 조금 더 넓은 관점에서 다르게 바라봐야 한다. 우리의 조그마한 분노가 과연 무엇에 의해서 만들어 졌는지 말이다.

우리의 초라한 분노가 생겨난 까닭은 작은 몫이라도 얻어내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는 현실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을 만들어낸 상대는 눈앞에 있는 알바생, 업주, 젊은이들이 아니다. 우리가 믿었고 선택한 바로 그 구세주들이 만들어 온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작은 일들에 다투고 있을 때, 정작 우리의 마땅한 몫은 탐욕스러운 그들이 독차지해왔다. 이렇게 우리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은 단순히 나약한 ‘개, 돼지’라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그러한 탐욕스러운 구조를 허락했기 때문이다.

©픽사베이

상상과 반대의 현실에 단호한 저항을

수만 명의 관중이 모인 스포츠 경기장을 상상해보자. 멋진 경기와 훌륭한 기예를 펼치는 선수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경기가 그 스타플레이어들만으로 구성되는 것일까. 경기를 진정으로 완성시키는 사람은 그들을 응원하고 바라보는 관중이다. 관중이 없다면, 경기는 남들보다 조금 특출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의 몸짓일 뿐이다. 관중의 시선이 있을 때 비로소 선수들도 인정받게 된다.

마찬가지로 대한민국도 다수의 평범한 국민이 지닌 힘으로 구성된 나라이다. 우리는 이명박, 박근혜가 제시한 좋은 삶에 대한 정의와 성장과 성공에 동의했다. 오늘의 이 사태를 만들어낸 동조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이러한 시대를 바로잡을 수 있는 힘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토록 힘겹게 얻어낸 1987년의 승리는 우리 스스로가 주인임을 제도적으로 확인해낸 업적이다. 그 승리를 통해 만든 헌법은 우리가 국가의 주권자이며, 권력의 근원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무리 시위를 하고, 비분강개의 글을 써도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절망적 상황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허무와 회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구세주만 기다리는 것은 또 다른 최순실을 기다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게 고분고분한 우리는 또다시 그들의 가장 든든한 지지자가 될 뿐이다. 우리의 자유는 어떤 자유여야 하는지, 우리는 과연 어떤 세상에 살고 싶은지, 우리가 추구하고자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우리가 꾸는 꿈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상상해야 한다. 현실이 그 상상과 반대로 나아가고 있다면 단호하게 저항해야 한다.‘상상력에게 권력을! (L'imagination au pouvoir!)’[오피니언타임스=이동구, 이윤하, 서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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