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진의 글로보다]

가끔 세 살배기 아이와 함께 키즈카페나 식당 한편에 자리 잡은 놀이방에 갈 때가 있다. 많은 아이들이 서로 부대끼다 보니 다툼이 종종 일어난다. 내 아이가 손을 물린 적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아이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상대방 아이에게 가서 먼저 괜찮냐고 물어보게 한 다음 미안하다고 사과하게 한다. 아이는 순순히 사과할 때도 있고 안하겠다고 버티며 억지를 부릴 때도 있다. 그럴 때면 한참을 어르고 달랜 끝에 결국엔 아이가 “미안해. 다음부터 안 그럴게”라고 혀 짧은 소리로 사과하지만 아이는 얼마 안가 또 비슷한 잘못을 저지르곤 한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10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7차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청와대 방면으로 행진하고 있다. ©포커스뉴스

사과가 넘쳐나는 시대다. 현직 대통령은 자신이 연루된 국정농단 사건에 대해 무려 3번이나 사과하더니 결국 탄핵이 의결되어 직무정지됐다. 청문회에 불려 나온 재벌 총수들과 고위직 공무원들은 하나 같이 국민께 송구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자신을 둘러싼 의혹에 관한 질문에는 잘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다며 피해가거나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그들의 사과에 공감이 가지 않는 것은 그저 입버릇처럼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 할 뿐 자신이 누구에게, 무엇을 잘못했는지 잘 모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은 평생 일본의 진정한 사과를 기다려왔지만 아직도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했다. 오히려 일본은 끊임없이 과거사를 미화하며 자신들의 끔찍한 범죄를 정당화하고 심지어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시키고 그저 덮으려고 한다. 같은 전범국이지만 나치 부역자는 아무리 고령의 노인이라도 기어이 법정에 세워 실형을 받게 하는 독일과 정반대의 모습이다. 독일이 자신들의 과거사에 엄격한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똑같은 잘못이 되풀이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억울하게 희생된 피해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다.

어떤 불행한 일이 일어났을 때 우선적으로 책임자들의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문제해결의 첫 번째 단추다. 제대로 사과하려면 자신이 누구에게, 무엇을 잘못했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적절한 벌을 받고 다음부터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노력해야 잘못을 반복하지 않게 된다. 꽤 간단해보이지만 현실에선 전혀 그렇지 않다.

대통령 탄핵 의결을 이끌어낸 촛불 집회를 두고 정치권과 언론들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평화 집회이며 성숙한 시민 의식이 돋보인다고 추켜세웠다. 그러나 불과 1년 전, 민중 총궐기 집회에서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져 1년 가까이 병상에 머물다 사망한 백남기 농민의 죽음에는 그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다.

11월5일 서울 중구 명동성당에서 장례미사를 마친 고 백남기 씨의 운구 행렬이 성당을 빠져나와 광화문을 향하고 있다. ©포커스뉴스

유가족들은 끊임없이 책임자의 사과와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과 재발 방지를 위한 노력 등을 요구했지만 경찰과 정부는 고개 숙이지 않았다. 강신명 경찰청장은 정당한 법집행에 대해 사과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끝내 사과를 거부했다. 위헌 판결이 난 경찰 차벽과 관련 법 어디에도 없는 살수차의 폭력 진압의 불법성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나는 지금도 박근혜 대통령이 과연 백남기라는 이름 석 자를 알기는 할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 정도로 국가는 유가족들과 시민들의 요구를 철저히 외면했다. 심지어 담당 의사는 백남기 농민의 사인을 물대포에 의한 외인사가 아니라 병사로 기록했고 경찰은 유족들의 반대에도 정확한 사인 분석을 핑계로 부검까지 하려 했다. 마침 터진 국정농단 사건이 아니었다면 경찰은 부검을 강행했을 것이다. 경찰이 그렇게까지 부검에 집착한 것은 아마도 자신들의 책임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지금의 평화 집회는 성숙한 시민 의식 덕분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경찰의 과잉 진압이 없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시국이 바뀌고 분위기가 바뀌면 경찰의 시위 진압 방식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백남기 농민 같은 피해자가 또 다시 나타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소위 ‘세월호 7시간’을 대통령의 사생활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세월호 참사 발생 당시 대통령의 행적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그것이 밝혀져야 또 다른 참사를 막을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과하지 않는 사회는 곧 잘못을 모르는 사회, 책임지지 않는 사회이다. 우리가 제대로 된 사과를 요구하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서 같은 잘못이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해방 이후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서 제대로 된 역사 청산이 이루어졌다면 끊임없이 등장하는 친일파 논란과 역사 국정 교과서 같은 사회적 갈등은 없었을 것이다. 사과하지 않는 사회의 미래는 결코 밝을 수 없다. 우리 아이들에게 어두운 미래를 물려주는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오피니언타임스=김동진]

 김동진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한때 배고픈 영화인이었고 지금은 아이들 독서수업하며 틈틈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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