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철의 석탑 그늘에서]

양식(樣式)이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겉모습을 말한다. 미술사학에서는 그렇게 형성된 해당 시대의 특징을 보여주는 양상을 일컫는다. 불교미술이라면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양식이 각각 존재했고, 이후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의 양식이 있었다. 물론 여기에 더 시대를 잘게 쪼갠 양식도 다양하게 존재했다. 그런데 ‘21세기 대한민국 불교미술’의 양식은 과연 존재하고 있을까. 대답은 불행하게도 ‘아니다’다.

보물 제41호 남원 실상사 약사전 철조여래좌상. ©문화재청

전라북도 남원의 실상사로 가보자. 9세기 통일신라시대 구산선문(九山禪門)중에서도 가장 먼저 세워진 유서 깊은 절이다. 실상사의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존재는 철조여래좌상이다. 높이가 269㎝에 이르는 여래좌상은 창건 시기 조성되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는 실상사의 명물이다. 손모습(手印)으로 보면 중생을 극락세계로 이끄는 아미타여래지만, 실상사에서는 약사여래로 불린다. 약사여래가 모셔진 전각에도 ‘약사전’이라는 편액이 붙었다.

약사전은 세조 14년(1468) 불탄 이후 효종 10년(1659) 중창됐고 숙종 27년(1701) 삼창됐다. 최근 흰개미 습격으로 피해를 입어 해체 보수 작업을 벌여야 했는데, 실상사는 여래좌상을 불단에 다시 모시면서 의미있는 불사(佛事)를 하나 더 추진했다. 그저 옛날 것을 모방한 불화(佛畵)가 아니라 오늘날의 시대정신을 담은 후불탱(後佛幀)을 모시자는 데 사부대중이 의기투합한 것이다.

‘지리산 생명 평화의 춤’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약사전 후불탱은 지난해 봉안됐다. 세 폭으로 이루어진 후불탱을 조성한 불모(佛母)는 동양화가 이호신이다. 부처뿐 아니라 화개장터, 운조루, 서천리 장승, 산천재 같은 의미 있는 주변 모습도 담았으니 파격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이 후불탱 하나로 불교회화에 새로운 양식이 성립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 해도 전통을 잃어버린 시대, 불교 미술의 돌파구가 되지 않겠느냐는 기대는 작을 수 없다.

실상사 이야기를 길게 꺼낸 것은 창조와 보존이 따로따로 노는 우리 문화 관련 정부 조직의 문제점을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실상사 약사전은 비지정 문화재다. 그럼에도 실상사 전체가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이고, 약사전은 이 절의 역사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전각인 만큼 보수 비용은 문화재청이 지원한다. 그런데 약사전 후불탱처럼 완전히 현대적 불화라면 사정은 다르다.

동양화가 이호신이 그린 실상사 약사전 후불탱. 세 폭 가운데 한 폭이다. ©실상사

문화재청은 ‘전통적’이 아닌 것의 지원에는 손사래를 칠 수 밖에 없다. 문화재당국이 전통 불화가 아닌 현대 회화로 분류할 수밖에 없는 그림에 지원을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담당자는 감사에 지적돼 처벌 받을 가능성조차 없지 않아 보인다. 이런 사례가 닥치면 문화재청은 문화체육관광부나 문화예술위원회의 현대 미술 지원 프로그램을 알아보라고 권고할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미술을 포함한 현대 문화 활동의 산물과 문화재 혹은 문화유산을 가르는 시간적 차이는 눈깜짝할 순간도 되지 않는다. 오늘날의 문화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문화재 혹은 문화유산이 되는 것은 필연이다. 그럼에도 과거와 현재의 소통이 자유롭지 못하도록 문화조직을 방치하는 것은 문제다. 그 소통을 결정적으로 가로막고 있는 존재가 문화재청이다.

문화재나 문화유산은 ‘과거에 만들어졌지만 미래지향적 가치가 담긴 그 무엇’이다. 문화재나 문화유산이 오늘날에도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면 미래지향적 가치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화 정책은 현대적 불화의 사례에서 보듯 문화재 혹은 문화유산과 오늘날, 혹은 미래를 단절시킨다. 전국에는 적지 않은 절이 새로 세워진다. 전통적인 양식의 절집은 문화재 당국의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오늘날의 시대정신을 담은 절집은 지원대상이 아니다. 이래 가지고는 새로운 양식이 태어날 가능성은 전혀 없다.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을 심의하고 있다. 헌재가 탄핵안을 인용한다면 대통령선거는 앞당겨지고, 새로 출범할 정부는 기존 정부 조직부터 손보려 들 것이다. 개인적으로 품위 있는 정부, 품위 있는 국가가 되려면 문화유산부가 있어야 한다고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다. 하지만 문화유산부가 아니더라도 문화재청과 새로운 문화 관련 부처의 정책 기능은 합치는 것이 옳다. 과거, 현재, 미래의 문화가 더불어 소통하지 못하는 정부 조직으로는 문화강국이 되지 못한다. [오피니언타임스=서동철]

 서동철

 서울신문 논설위원

 문화재위원회 위원

 전곡선사박물관 운영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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