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현의 문화로 만나는 세상]

‘골든 에이지’라고 했다. 16세기 말 영국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신·구교의 대립을 명분으로 자국의 세력 확장을 위해 벌인 종교전쟁에서 절대 약세였던 영국이 최강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침몰시키고 유럽의 패권을 차지했으니 그럴 만하다. 그 황금시대(Golden Age)를 연 주인공이 여왕 엘리자베스 1세(1533~1603)이다. 스물다섯에 왕위에 올라 대영제국을 건설한 그녀는 영화의 주인공으로도 심심하면 등장했다. 영광의 역사를 통해 지혜를 얻자는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영국의 자부심과 향수가 배어있음을 숨길 수 없다. 10년 전에 나온 세카르 카푸르 감독의 <골든 에이지>도 마찬가지다. 평생을 처녀로 살다간 여왕에 대한 신비감과 호기심은 당연하다. 역사가 기록하기 꺼렸던, 기록하지 않은 여자로서의 감정과 삶도 궁금하다. 그래서 영화에는 탐험가 라일리와의 사랑이 단골로 등장한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지만 여왕이 아닌 여자로서 사랑에 푹 빠져보고 싶은 욕망, 시녀인 베스를 선택한 라일리에 대한 배신감, 베스에 대한 질투심, 주름살에 대한 걱정. 여기에 사촌동생 메리를 반역죄로 몰아 처형해야 하는 인간적인 괴로움과 혼자인 여자로서의 외로움.

‘골든에이지’ 스틸컷 ©네이버영화

엘리자베스 1세가 ‘롤 모델’이라고?

이런 모습을 통해 그녀는 우리에게 하소연한다. “도대체 왕의 자리가 뭐 길래, 이렇게 많은 고통을 감수해야 하느냐” “남자 왕과 달리 왜 여왕은 여자로서 사랑 받는 기쁨을 누릴 수 없느냐”고. 여왕이기 때문에 포기하고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며 산다. 영화도, 여왕도 절대 ‘품위’를 잃는 일은 없다.

그리고 스스로 해답도 찾아낸다. 이 모든 선택이 신이 그렇게 하도록 했다는, 바로 ‘소명(召命)의식’이다. 엘리자베스 1세는 외친다. “나는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남편과 아이가 없다. 나는 국민의 어머니다.” “신은 나에게 이런 힘든 짐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셨다.”

그녀는 그 힘으로 조국을 지켰으며, 자신의 영혼까지도 ‘조국’에 바치기로 한다.그 소명의식이 라일리의 배신을 용서하게 만들었고, 사촌을 죽인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했으며, 폭풍보다 무서운 전쟁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평생 ‘처녀여왕’으로 살면서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지키는 평화와 번영의 ‘골든 에이지’를 만들었다.

이쯤 되면 그 소명이 설령 거짓이나 위선, 착각이라 하더라도 자랑할 만하다. 그 덕분에 영국은 번영과 발전을 누렸고, 그녀는 조국을 위해 삶과 열정을 바친 여왕으로 역사에 남았으니까.

이런 엘리자베스1세를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의 ‘롤 모델’로 꼽았다. 그녀처럼 살고 싶고, 그녀와 비슷한 여왕이 되겠다는 얘기였다. 실제로 코스프레한 것도 적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엄청난 착각이고 어이없는 욕심이었다. ‘소명’이란 이름아래 권력을 잡았지만 지금 나라를 어떻게 되었는지 보라. 탐욕과 부패, 잔인함과 뻔뻔함, 무능함과 무책임으로 국민은 피와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런데도 자신의 과오가 무엇인지 모른다. 아니면 모르기로 작정했거나, 거짓말조차 기억하지 못하거나. 인간은 겉모습이 비슷하다고 속까지 같은 것은 아니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스틸컷. ©네이버영화

‘사이보그’지만 괜찮다?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드러난 박근혜 대통령의 어이없는 행적, 사태 이후의 언행들에 대해 답답해하거나 분통을 터뜨리는 국민들이 많다. 그 때문에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아무리 비선실세에 의지했다 하더라도 명색이 대통령이 그렇게까지 무책임하고 무능하고 무식할 수 있나, 대통령으로서 어제 국민에게 한 약속을 오늘 아무렇지 않게 어겨도 되나, 대통령이라고 법을 마구 무시해도 되나. 이제는 누가 봐도 거짓말인데 진실인 것처럼 태연하게 말할 수 있나.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다. 당연하다. 출발부터 잘못됐다. 상식이 아닌 것을 상식으로 풀면서 답이 나오기를 기대하니까.

역시 10년 전 영화 이야기다. 인간이면서 자신을 사이보그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가려는 여자가 있었다. 우리도 살면서 한번쯤은 손가락에서 총알이 발사되고, 높은 곳을 가뿐히 올라가는 슈퍼맨이나 사이보그가 되는 몽상을 한다.

그런데 이 여자는 진짜 그렇게 되고 싶어, 될 줄 알고, 칼로 손목을 긋고는 그곳에 전기선을 연결해 에너지를 얻으려 하다 감전으로 쓰러진다. 그녀는 몽상, 환상, 착각의 세계에 머물기를 고집하는 정신분열증 환자였다. 때문에 얼마든지 자신은 사이보그가 될 수 있었다.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은 상처와 욕망이었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강제로 요양원에 끌려가는 것을 보고, 너무나 사랑했던 할머니와의 이별은 그녀에게 엄청난 상처와 충격을 주었고, 그 고통과 자극이 한계를 넘어서면서 그녀의 정신세계도 공기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 풍선처럼 터지고 말았다.

정신병자들은 그들만의 몽상의 세계와 우주를 펼친다. 박찬욱 감독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정말 그들의 세계를 알고 싶다면 당신도 그녀의 친구인 박일순처럼 정신병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그들만의 진실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럴 자신이 없다면 ‘사이보그’인 그녀의 행동과 마음을 이해하려고 하지마라.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2월25일 취임식을 마치고 ‘희망의 열리는 나무’ 행사에 참석해 국민들의 희망이 적힌 오방낭 복주머니 속 글을 읽고 있다. 이 같은 퍼포먼스를 최순실씨가 진두지휘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청와대

‘왕조시대’에나 있는 일이라고?

지난 연말, 유교의 민본과 위민으로 유교민주주의를 모색하는 <정치, 함께 살다>를 펴낸 안외순 한서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동·서양 정치사상을 연구하는 그가 지금의 대통령과 비선실세들의 국정농단에 대해 일부 방송 패널들이 “왕조시대도 아닌데 어떻게 이럴 수 있나”라고 하는 말에 화를 냈다.

그래서 책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왕조국가도 왕조국가 나름이지.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하는 왕조국가, 특히 한반도에 존재했던 왕조국가에서는 씨도 안 먹히는 소리다. 이 정도의 국정농단 사안이면, 연산군이나 광해군의 사례에서 보듯이, 반정이든 방벌이든 혁명이든 쫓겨나도 열두 번은 더 쫓겨났다’고.

국정농단을 방기하거나, 마름처럼 앞장서 도운 ‘측근’들의 태도에 관해서도 일갈했다. 퇴계 이황, 남명 조식, 율곡 이이 등 조선왕조 지식인이자 관료들은 군주가 잘못하면 서릿발같이 간언하고, 그래도 안 되면 사직으로 맞섰다면서 대면보고도 못하면서 자리나 유지하는 보신주의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 이곳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어이없는 대통령의 행적, 비선실세의 국정농단, 측근들의 횡포와 농간은 어디 시대에 그나마 가능한 일일까. 안 교수의 말처럼 조선왕조시대는 어림도 없으니, 여왕이 있던 신라시대로 가야 하나.

파헤칠수록, 과거로 거슬러갈수록 상상을 초월하는 등장인물들의 관계, 음습하고 천한 온갖 음모와 추태, 그리고 섬뜩한 사건들은 또 어디서 만날 수 있나. 영화와 소설에는 없으니, 그리스나 로마 신화에서 찾아보라는 사람도 있다. 아니면 지금 그대로 자세히 기록만 하고 시대를 되돌려 고대 신화의 한 자리에 집어넣든지. [오피니언타임스=이대현]

 이대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

 전 한국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저서 <소설 속 영화, 영화 속 소설>,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外 다수

오피니언타임스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