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관의 모다깃비 감성]

수많은 사람들이 뛰어내렸다던 마포대교를 간 적이 있다. 소설쓰기 전 소재를 찾기 위한 사전 작업에서였다. 날은 생각보다 추웠다. 주변 건물이 사라지고 다리 중앙으로 다가갈수록 바람이 거세졌다. 굉장히 차가워 보이는 한강이 아래에 있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 붉은색 보트를 타고 다니는 소방관도 간간히 보였다. 간헐적으로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돌아다녔다. 누군가 난간을 붙잡으면 확성기로 물러나라고 경고했다.

나는 짭조름한 삼각김밥 하나를 먹고 난 뒤 세 시간여를 다리 위에서 서성였다. 비욘세의 ‘I was here’를 내내 들었다. 자살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문구들은 내 걸음에 맞춰서 불이 들어왔다가 꺼지곤 했다. 그런데 그것마저 차가웠다.

2013년 부산국제광고제에 출품된 ‘생명의 다리’ 작품. ©부산국제광고제사무국

2012년 생명의 다리로 조성이 된 마포대교는 투신율이 오히려 4배를 넘어버렸다. 조명이 들어오는 문구들이 비수를 꽂는 말들이었을까? 아니다. 위로를 위한 말만 있었다. 힘내라, 사랑한다, 너는 소중하다, 고생했다, 같이 있기만 해도 웃음이 나는 당신은 그런 사람. 오늘 하루 어땠어. 수많은 문구들 중에 모진 말들은 없었다. 그런데도 왜 더 뛰어내렸을까. 더 따뜻하지 못해서? 난간이 너무 낮아서? 생각보다 간단하다. 위로가 위로 같지 않아서다.

사회는 갈수록 개인화가 진행되고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에서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자신을 노예화시켜버렸다. 스스로 채찍질 하고 스스로 위로한다. 정서적 자위의 정점이다. 게다가 한국은 집을 사려면 평생을 일해야 하고, 빚더미에 앉은 채로 취직을 하는 곳이다. 아홉 개의 삶을 포기하고, 아홉 개의 스펙을 기본으로 쌓아야 하는 곳. 생존경쟁이 일상화됐으며, 시국조차 혼란스러운 곳. 불확실한 미래가 불편한 환경 아래 놓여있으니 총체적 난국이다. 임란때 나온 각자도생(各自圖生)이 지금 다시 떠오르고 있다.

가파른 절벽 사이로 위험천만한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데 사방에서 힘을 내라는 소리가 들린다. 내 일에 집중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소소한 격려가 들려봤자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불안하다. 피로가 가득한 사회이자 불안이 만연한 사회다. 힘 내라는 사람은 많지만 곁에 있어주는 사람은 없다. 이 와중에 꿈꾸던 것이 실패하면 단순 좌절로 끝나지 않는다.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날 배신하는 것만 같은 비참함이 몰려온다.

붙잡으려던 동아줄을 영영 놓쳐버린 것만 같은 사람들에게 어설픈 격려의 말은 해롭다.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가치를 알려줄 수 있는 말이 필요하다. 하지만 마포대교의 문구들이 뛰어내리려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이미 호랑이가 이빨을 드러내고 오는 와중에 힘을 내란 소리를 들은 사람은 상대에게 뭐라고 할까. 고맙다고 할까, 울면서 닥치라고 할까. 우리는 그들에게 어떤 말을 꺼내야 하는가.

©픽사베이

흔들다리 효과라는 것이 있다. 흔들리는 다리 위에서 만난 이성에 대한 호감도가 안정된 다리위에서 만났을 때 보다 더 상승한다는 것이다. 땅이 흔들려서 두근대는 심장박동을 상대방에 대한 호감으로 착각하는 귀인오류에 해당한다. 이는 인간의 심리가 가지는 어리석음일지도 모르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이 갖는 피할 수 없는 애처로움일지도 모른다.

불안할 때 곁에 있어주는 사람에게 더 마음가는 것이 인간이다. 어떻게 할지 몰라 울먹이는 어린아이들과 사회에 놓인 우리는 별반 차이가 없다. 힘내라고 외치는 것이 아닌, 위태로운 다리에서 서로의 손을 잡아주는 것이 더 좋은 것일지 모른다. 모든 것을 놓으려고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깜빡거리는 격려 문구가 아닌 붙잡아주는 손이다. 당신과 내가, 불완전한 우리가, 침대에 누워 복에 겨운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닌, 같이 서럽고 불안한 길을 걷고 있는 동반자라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 어디서 감히 주저앉아 우는 것에도 지친 사람에게 글자 몇 개로 위로하려고 하는가.

생명의 다리를 없애겠다는 소리가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서울 마포대교, 위로 같지 않은 위로의 말들은 난간에 남아있다. 난간만 높아진 채다.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로 전부 반박할 수 있는 문구들은 사라져야 한다.

필자 또한 글을 쓰지만 누군가가 서러워하면 위로의 글보다는 어디냐고 물어본 뒤 나갈 준비를 한다. 우울함을 도저히 못 견딜 때는 키보드가 아니라 전화기를 붙잡는 한낱 인간일 뿐이다. 극심해지는 개인주의 아래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유대라는 것을 잊지 말자. 마포대교에 갔을 때, 떨리는 손으로 난간을 붙잡는 누군가가 있다면 섣불리 위로의 말을 꺼내지 마라. 가만히 옆에 가 서있어 주는 것이, 그들의 입을 열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 중 하나일지 모른다. [오피니언타임스=신명관]

 신명관

 대진대 문예창작학과 4학년 / 대진문학상 대상 수상

 펜포인트 클럽 작가발굴 프로젝트 세미나 1기 수료예정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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