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현의 문화로 만나는 세상]

<희망가>는 묻는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고. 흙먼지 휘날리는 어지러운 세상, 티끌처럼 허망한 인생.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다시 꿈같구나.’

우리나라 첫 대중가요는 이렇게 일장춘몽인 인생과 혼탁한 세상에 대한 자조적이고 애잔한 타령이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인 1923년쯤부터 사람들이 부르기 시작했고, 가수이자 배우인 전영록의 고모부로 국내 최초 음반취입 가수인 채규엽이 불러 크게 유행시킨 노래 <희망가>.

일제강점기에 ‘희망가’를 부른 채규엽과 희망가 가사. 2017년 해돋이를 즐기는 관광객들. ©문화콘텐츠닷컴/동해시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모른다. 미국의 찬송가 <우리가 집으로 돌아올 때>란 말도 있고, 1910년 1월 배가 뒤집혀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잃은 12명의 여중생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그 여학교 교사가 가사를 짓고 학생들이 불러 당시 일본에서 널리 유행했다는 진혼곡 <새하얀 후지산 기슭>에서 가져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누가 가사를 붙이고, 편곡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당시 음울하고 체념적인 시대정서, 불교적 인생관을 바탕으로 이 노래가 <탕자자탄가> <청년경계가> 등 여러 제목으로 불리면서 지금도 마치 ‘구전가요’ 같은 느낌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면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것만은 분명하다. 1970년대에는 이문구가 첫 구절 ‘이 풍진 세상을’을 소설 제목으로 졸부의 시대착오적 탐욕을 풍자하기도 한 <희망가>는 ‘역설’이다. 삶의 희망을 묻고는 그것이 성공과 쾌락이 아니라 체념과 망각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허무와 비움이야말로 3.1운동의 실패로 꿈이 좌절된 동포들에게 위로와 위안의 ‘희망’인지 모른다.

철학적이면서도 함축적인 사자성어, 공감각적인 언어들로 추측컨대 노랫말을 쓴 이는 시인이나 당대 지식인이었을 것이다. 그도 암울한 세상과 고달픈 삶, 나라 잃은 설움에 좌절하고 허탈했을 것이다. 그래서 희망 잃은 세상에서의 부귀영화, 담소화락, 주색잡기도 한낱 ‘봄날의 꿈’같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힘들고 지친 나머지 ‘세상만사를 잊었으면 희망이 족할까’라고 자조한 것은 아닐까.

때론 유행가도 한 시대의 풍미로 끝나지 않고, 사람들에 의해 오랜 세월을 이어가기도 한다. 세상사가 늘 새로운 것만은 아니며, 시대와 장소를 바꿔 되풀이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는 100여년 전의 일본 카마쿠라 여학생들 비극과 그들을 위한 노래 <희망가>를 떠올리게 한다. 이렇게 유행가는 시대에 따라, 부르는 사람과 듣는 사람에 따라 새로운 의미로 다가간다. 

언론사의 한 선배는 ‘노래도 늙는구나’라고 했다. 삶에서 우러난 노래는 다른 사람들의 삶까지 담고, 세월과 함께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젊은 시절에는 듣지도 부르지도 않던 노래, 유치하고 고리타분해 보이던 가사도 어느 때부터인가는 인연과 의미가 되고, 가슴 속 깊이 들어와 위안이 된다. 다소 퇴폐적이면 어떻고, 궁상스러우면 어떠랴. 노래 하나로 내가 위로받고, 누군가 위로해 줄 수 있다면.

이선희가 2014년 JTBC 히든싱어에 출연해 희망가를 부르고 있다. (위) 나훈아는 2003년 발매한 대한민국 가요 대전집에서 희망가를 불렀다. ©JTBC, 네이버음악

100년 가까운 세월을 산 <희망가>를 다시 떠올린 것은 몇 년 전이었다. 왜 수많은 노래 중에서 <희망가> 였는지 정확히 알 길은 없다. 새로운 삶 앞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희망’을 갈구하면서 세상만사가 춘몽 같고, 부귀영화가 부질없다는 노랫말이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마음이 편안했다. 아쉬움, 억울함, 우울함도 녹아내렸다.

가수마다 달랐다. 나훈아의 울림이 깊은 노래는 애잔한 느낌, 허공을 향해 소리치듯 하는 장사익의 노래는 해탈의 느낌이었다. 이선희가 어느 TV프로그램에 나와 부른 명상적 <희망가>는 마음을 쓰다듬어 주었다. 가끔 작은 목소리로 직접 부르면 초로의 삶에 진정으로 바라는 희망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나마 떠오른다. 노래의 힘이다.

이렇게 낡고 늙은 유행가도 누구에게는 ‘희망’이다. <희망가>가 허무나 포기, 절망이 아니라 ‘위안’과 ‘힐링’이다. 부질없는 욕심을 비우고, 온갖 번뇌를 버리고 감사와 평안으로 나아가게 한다. 삶이 어느 때보다 팍팍한 요즘에는 드라마와 영화도 이따금 <희망가>를 부르면서 우리에게 희망은 악착같이 집착하고 누림으로써 채울 수도 있지만, 스스로 낮추고 버림으로써 채울 수 있다고 말한다. 

궁금하다. 자신만의 탐욕과 집착에 빠져 세상을 어지럽히고, 국정을 농단하고, 국민들을 절망과 허탈에 빠뜨린 사람들, 그 잘못으로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졌거나 떨어지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희망가를 부르는지. <희망가>는 말한다. 꿈이라고. 남김없이 비우라고. [오피니언타임스=이대현]

 이대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

 전 한국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저서 <소설 속 영화, 영화 속 소설>,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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