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진의 민낯칼럼]

2차대전 당시 북아프리카에서 독일군을 격파한 영국군 사령관, 서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 북대서양군사령관 등을 역임한 전쟁영웅 몽고메리 장군이 퇴역 후, 자동차를 몰고 런던시내를 지나다가 속도위반으로 교통순경에게 ‘딱지’를 떼었다. 몽고메리 장군은 “내가 독일군을 추격해서 베를린까지 휘몰아나가도 딱지 뗀 일이 없었는데…”하며 중얼거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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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영웅이고 위반은 위반이라는 생각이었는지 모른다. 또한 그 교통순경은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하다고 맡은 바 직무를 충실히 집행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식의 기계적 사고방식이 스스로의 ‘겉멋에 들린 맛’은 있을지 몰라도 정작 제대로 된 ‘멋’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대장으로부터 ‘아무도 통과시키지 말라’는 지시를 받은 초병이 사령관의 통행까지도 제지시켰다는 일화는 임무수행의 엄정함을 강조하기 위해 훈화적으로 인용할 수 있는 이야기일 뿐, 만사를 그런 식으로 했다간 될 일이 없게 된다. 중대장이 취침명령을 내렸다고 해서 소대장의 비상출동 명령을 무시하면 어찌 되겠는가? 대리가 과장의 지시를 받아 장부정리를 하던 중, 때마침 부장이 중요한 계약서 작성을 지시했을 때 이를 거부하고 장부정리만 강행한다면 회사운영이 잘 될 리 없다.

2차대전의 영웅이었다고 해서 규칙을 마구 어기고 법을 무시해도 좋다는 얘기로 들었다면 정말로 유감이다. 말인즉슨 국민적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에 대한 ‘가급적 예우’는 있어야지, 그것도 없다면 분별없는 로봇 세계나 동물의 세계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2010년 7월 어느 날, 일본 동경에서 열린 장애관련 UN회의, ICIDH-II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여름을 맞아 동남아 일대에 괴질이 돌아 일본에 입국을 하려면 ‘예방접종증’이란 걸 갖고 가야했는데 깜빡 잊었다. 나리타공항에서 입국수속 도중 당연히 문제가 생겼다.

“예방접종증명서 보여주세요”
“안 가지고 왔습니다”
“그럼 여기서 예방접종을 받으십시오”
“아니, 나는 이미 서울에서 예방접종을 받았습니다. 단지 증명을 가져오지 않은 겁니다”
“예방접종 받으셨다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습니까?”

나는 그보다 한달 전에 본회의를 앞두고 일본 측과 아젠다를 협의하기 위해 동경에 다녀온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 입국 사증란의 일본 출입국 스탬프를 보여 주었다.
“여기 보십시오. 나는 일개월 전에도 동경에 다녀간 일이 있습니다. 내가 예방접종을 받지 않았다면 그때 입국수속을 할 수 없었거나 예방접종을 받고 입국했을 것 아닙니까?”
일본의 방역관리는 내 여권을 들여다보더니 납득했다.

문제는 증명서라는 ‘종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방접종을 했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을 일본관리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냥 수속을 끝낼 수 있었다. 만약 출입국 관리업무를 사람이 하지 않고 로봇이 했다면 나는 그날 나리타공항에서 또다시 예방접종을 했을 것이다. 인간 분별이나 판단을 봉쇄하고 기계적으로만 일을 처리한다는 것은 인간능력의 중요한 부분을 폐품화시키는 인간모독, 자기모독의 행위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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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의 저서 <사상과 경험>에도 그런 무기물적 인간이 나온다. 1911년 1월3일, 런던의 시드니가(街) 100번지 건물에 든 폭도들과 그 주변을 포위한 경찰대의 총격전이 벌어졌다. 영국경찰은 비무장으로 유명하지만 그때는 무장폭도들이 총을 난사하여 많은 경찰관들이 부상을 당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경찰은 시내 총포상에서 거둬온 엽총으로 응사했다.

한참 사격전 끝에 건물은 불이 붙어 불길이 자꾸만 커졌다. 폭도들은 건물 안에서 불길을 피하면서 밖을 향해 총을 마구 쏘아 근처의 벽돌담이나 길바닥 할 것 없이 총탄이 마구 튀어 위험한 상황이었다. 불이 계속 번지자 사이렌을 울리며 소방차가 출동했다. 이를 본 경찰대를 지휘하던 경감은 소방차의 정지를 명령했다. 그러나 소방대장은 ‘불을 끄는 것이 우리 본연의 직무이며 폭도, 사격전, 비상저지선 따위의 말은 런던소방대 규칙에는 적혀있지 않다’고 말하며 말을 듣지 않았다.

폭도들이 총을 겨눠 쏠지 모른다고 경감이 겁을 줘도 소방대장은 ‘규칙은 규칙이니 굽힐 수 없다’고 억지를 쓰자 보고를 받고 현장으로 달려왔던 당시 내무부장관 처칠이 화를 벌컥내며 말다툼에 간섭했다. 처칠은 소방대장에게 ‘그 집은 타는 대로 내버려 두라, 그러나 불길을 막아야 하니까 잠시 대기태세를 취하라’고 지시했다. 맡은 바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총탄이 튀건 무슨 일이 있건 아랑곳하지 않고 매진하는 자세는 높이 살만한 일이다. 그러나 거기에 무리나 어거지가 섞이게 되면 올바른 직무수행이 아니게 된다.

어린 시절, 처칠의 이 책을 읽고 소방대장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또한 지금까지도 그 소방대장의 자세를 거울삼고 몸에 익히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기본적 마음가짐이며 성실한 자세를 갖추는 본보기이지 실질적으로 매일같이 사사건건 모조리 그런 식으로 하는 게 일다운 일을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오피니언타임스=안희진]

 안희진

 한국DPI 국제위원·상임이사

 UN ESCAP 사회복지전문위원

 장애인복지신문 발행인 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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