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철의 석탑 그늘에서]

책을 싸게 파는 행사장에 우연히 갔다가 옛사람의 문집 몇 권을 사들고 왔다. ‘농암집’도 그중의 하나였는데, 눈길 가는 글이 적지 않았다. 농암 김창협(1651~1708)은 조선 성리학을 심화·발전시킨 당대 최고의 권위자로 꼽힌다. 문학에서도 창작과 비평 양면으로 탁월한 성취를 이루었다. 농암은 형인 몽와 김창집(1648~1722), 아우 삼연 김창흡(1653~1722)과 삼형제 문인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미술에 겸재 정선이 있다면 문학에 안동 김씨 삼형제가 있다고 할만큼 이른바 진경문화를 이끈 대표적 인물들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농암집을 넘기다 ‘절교를 선언하다’는 글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1698년 김창협이 당시 우의정이었던 명곡 최석정(1646~1715)에게 보낸 편지다. 명곡은 10차례가 넘게 영의정을 지낸 것으로 유명하다. 의리론이나 명분론에 집착하지 않고 현실정치의 틀에서 백성의 어려움을 덜어주려 했던 행정가였다. 당쟁이 격화하는 것을 막아보려 노력한 명곡이었지만, 당시 상황에서 그 자신이 정치적 논란의 중심에 서는 것은 불가피했다.

17세기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조정은 두 개의 세력으로 나뉘었다. 척화파 김상헌 측은 명나라와 의리를 지켜 청나라와 싸우자고 주장했고, 주화파 최명길 측은 조선의 존립을 위해 청과 강화를 맺자고 강조했다. JTBC 뉴스룸에서 정치권의 사드배치 갈등과 관련 이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다. ©JTBC뉴스룸

이쯤해서 농암과 명곡의 인연을 살펴보는 것이 순서다. 김창협의 증조할아버지는 청음 김상헌(1570~1652)이고 최석정의 할아버지는 지천 최명길(1586~1647)이다. 두 사람이 병자호란 당시 이른바 척화파와 주화파를 각각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김상헌이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명분과 원칙을 지키고자 목숨을 내걸었다면, 최명길은 역사의 오명을 뒤집어 쓸 것을 모르지 않음에도 현실적 대안을 찾았다.

개인적으로 백강 이경여(1585~1657)의 두 사람에 대한 평가가 매우 적절하다고 본다. 백강은 배청친명파로 청나라에 끌려가 심양에 억류되기도 했다. 백강은 ‘두 어른의 학문과 정치는 모두 나라를 위한 것인데/ 하늘을 떠받드는 큰 절개요 한때를 건져낸 큰 공적’이라고 했다. 말할 것도 없이 ‘큰 절개’란 청음을, ‘큰 공적’이란 지천을 가리킨다. 청음에게 조금 더 마음을 쓴 측면이 없지 않지만,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공을 몰아주지 않았다.

오늘날의 역사소설이나 TV드라마는 청음과 지천이 그야말로 극한 대립을 한 것으로 그려내곤 한다. 대척점에 자리하고 있던 두 사람이지만 실제로 원수처럼 지냈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두 사람의 서로에 대한 평가는 차갑기만 하다. 지천은 청음이 대의명분이 아니라 자신의 명성을 높이고자 척화를 말한다고 공공연해 주장했고, 청음은 고사(故事)를 들어 지천을 나라를 팔아먹는 간신으로 몰아세우기도 했다.

왕조실록을 들추다 보면 조정에서 벌어진 설전은 심하다 싶을만큼 과격한 모습을 보이는 대목이 자주 등장한다. 임금 앞에서 일개 신하란 존중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는 인식이 퍼져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일찍부터 승승장구했다고 해도 최명길은 김상헌보다 16살이나 적다. 게다가 두 사람의 집안은 선대부터 가까운 사이였다. 최명길의 아버지 최기남과 김상헌의 형 김상용은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했다. 함부로 대할 상대가 아니다.

조선시대 당쟁을 다룬 SBS 드라마 ‘장옥정’의 한 장면. ©SBS

그렇다 해도 두 사람이 완전히 다른 정치적 입장을 취한 것은 사실이었던 만큼 이후 청나라 심양에서 2년동안 감옥살이를 함께 하면서 화해한 것은 흔치 않은 미담(美談)의 하나로 꼽힌다. 김상헌은 병자호란이 끝나고 4년이 지난 1641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고자 조선에 출병을 요구한다는 소식을 듣자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심양으로 끌려갔다.

결국 조선은 청나라의 압박으로 출병을 결정하는데, 영의정 최명길은 명나라에 밀사를 보내 이런 사정을 설명하고, 전투에 적극 가담치 않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청나라가 알게 되자 최명길은 혼자 책임을 감당하겠다며 아들 최후량에게 자신의 장례용구를 들려서는 심양으로 떠났다. 두 사람은 호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존중하며 협력했다. 이후에도 후손들은 세교(世交)를 이어갔다.

그런데 김상협과 최석정의 시대에 이르러 두 집안이 속한 당파는 함께 가기 어려울만큼 멀어졌다. 의절의 결정적 계기는 농암이 기사환국 당시 진도에 위리안치된 아버지 문곡 김수항이 사약을 받게 만든 오시복을 다시 등용토록 건의한 사람이 명곡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앞서 명곡은 농암에게 편지를 보내 오시복을 등용해도 될지를 물었던 모양이다. 김상협의 편지 중에 ‘어떤 이의 부모를 죽인 자를 자신은 용서하고, 또 총애하려 하면서, 죽은 자의 자식에게 ‘그렇게 해도 되겠느냐 안되겠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는 대목이 그것이다.

청음과 지천의 화해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농암과 명곡의 절교는 개인의 절교를 넘어선 집안의 절연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안타깝다. 나아가 농암의 집안은 노론, 명곡의 집안은 소론으로 파당의 성격을 분명히 하는 계기가 됐다. 사실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청음의 자세는 철저히 노론적이다. 반면 언제나 현실적 최선책을 찾는 지천의 모습은 철저히 소론적이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청음과 지천의 서로 다른 소신이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해 국체를 보존하고, 마음으로 굴복한 것은 아니라는 자존을 지킬 수 있었다. 최소한이나마 실리와 명분을 모두 챙길 수 있었다고 해도 좋다. 하지만 소신이 파당으로 발전해 ‘상대가 죽어야 내가 사는’ 상황이 되면 실리는 간데 없고, 명분도 찾을 수 없게 되는 것이 세상이치다. 그런 점에서 절교를 통보하는 농암의 편지 한 장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극단적 양극화를 낳은 아주 작은 시발점의 하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피니언타임스=서동철] 

 서동철

 서울신문 논설위원

 문화재위원회 위원

 전곡선사박물관 운영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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