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 위에서 쓰는 편지]

굳이 이유를 대자면, 남쪽으로 성급한 봄 마중을 다녀오는 길이었습니다. 해토머리 바람은 겨우내 품었던 칼날을 감췄고 부드럽게 풀어진 들판은 새 계절을 맞이하느라 분주했습니다. 전라도를 거쳐 충청도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집 마당이라도 들어선 듯 마음이 푸근해졌습니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바다가 멀지 않은 소읍의 음식점을 찾아들어갔습니다. 백반이나 찌개 몇 가지를 파는 작은 식당이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뜻밖에도 꽤 북적거렸습니다. 아주머니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 할머니라고 부르면 섭섭해 할 초로의 동네 분들이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경사가 있는 누군가가 한 턱 내는 자리인지 제법 흥겨워보였습니다.

연극 ‘엄마열전’ 공연 장면.

비어있는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기다리는데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귀에 들어왔습니다. 아니, 어쩌면 일부러 귀를 기울였는지도 모릅니다. 광화문 광장의 촛불과 서울 광장의 태극기로 갈려 치열하게 대립하는 현실이 여기서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여전히 대통령 탄핵이 화제일까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마침 TV에서는 대통령 탄핵심판과 관련, 패널들의 대담이 방영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좌중의 아주머니 한 분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테레비(TV) 좀 꺼! 정치 얘기는 골치 아퍼.”
다른 아주머니가 장단을 맞추듯 말했습니다.
“그려. 저놈의 테레비 그만 봐야지. 짜증 나 죽겄어. 해도 해도 너무 하는 거 아녀?”

누가 너무한다는 뜻일까? 대통령이? 아니면 국회나 헌재가? 생략된 주어를 짜 맞추고 있는데, 또 다른 아주머니가 해답을 줬습니다.

“의지할 데도 웂고 하니께 그랬겄지. 그걸 가지구 나가라니 너무 심한 거 아녀.”

어라? 민심이 언제부터 대통령 쪽으로 돌아섰을까? 모인 분들의 연령이 비교적 높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뜻밖의 결과였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어디를 가든 통분의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아직도 여론조사는 국민 70% 이상이 ‘대통령 탄핵안 인용’에 찬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궁금했습니다. 대통령과 관련된 뉴스가 지겨워진 걸까? 아니면, 대통령 측의 ‘강짜 전략’이 먹힌 걸까? 충청도만 이런 걸까? 온갖 의문이 스쳐지나갔습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다음에 등장한 목소리는 비교적 젊은 아주머니였는데, 약간의 분노가 묻어 있었습니다.

“잘못이 없다고요? 재벌한테 돈 뜯고 최순실이 나라를 쥐고 흔들도록 만든 게 잘한 일이에요?”
평소에도 ‘말발’이 센 듯, 반론의 목소리는 없었습니다. 그녀의 공격적인 발언은 이어졌습니다.
“형님은 저번 대통령 선거 때 누구 찍었어요?”
“……”
“그 손가락 찧고 싶지 않으세요? 여자들이 깨어야 해요. 여자 대통령이 나온다고 하니 찍어줘야 한다고 난리들 쳤지만 이젠 입이나 뻥끗 할 수 있어요?”

땀을 닦는 척 하며 그녀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봤습니다. 분위기가 한쪽으로 쏠리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포커스뉴스

선거라는 말이 나오면서 화제는 대통령 선거로 넘어갔습니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유난히 큰 아주머니 한분이 건너편 아주머니에게 물었습니다.

“그 짝은 이번에 누구 찍을 껴?”
“글쎄유.”
“글쎄는 뭔 글쎄여. 안희정 찍어. 안희정. 대한민국의 중심 충청도에서도 대통령 한 번 해야 되잖여.”
“찍고 싶다고 찍어지남유? 경선을 이겨야 헌다는디 그게 쉽사리 되것슈?”
“문재인은 문제여. 벌써부터 대통령 다 된 것처럼 허구 댕기잖여. 안희정이 되야는디….”

또 다른 충격이었습니다. 나라가 통째로 흔들리고 온 국민이 분노로 들끓어도 ‘지역주의’라는 고질병은 여전히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생각에 절망감까지 들었습니다. 충청도가 이런데 경상도 전라도라고 바뀌었을 리 없겠지요.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고 갈수록 중구난방이 됐습니다. 조금 엉뚱하다 싶지만 예사롭지만은 않은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국회의원들이 잘못해서 나라가 이렇게 된 겨. 전부 내쫒어야 되어.”
“전부 내쫓으면 나라일은 누가 헌대유?”
“새로 뽑으면 되지.”

어느덧 시골 음식점도 백가쟁명(百家爭鳴)의 토론장이 돼 있었습니다. 고개만 끄덕이거나 못 들은 척 천장바라기를 하는 아주머니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개는 적극적으로 의사를 밝혔습니다. 표본이 많은 것도 아니고, 모여 있는 분들의 말을 모두 들어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충청도의 여론은 어떻더라’고 단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분위기의 일단만 전할 뿐이지요. 다만 온 국민이 혼돈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 하나는 분명했습니다. 우리에게 드리운 구름이 언제나 걷힐지, 떠날 때보다 더욱 무거워진 가슴으로 귀경했습니다. [오피니언타임스=이호준]

 이호준

 시인·여행작가·에세이스트 

 저서 <자작나무 숲으로 간 당신에게>, <문명의 고향 티크리스 강을 걷다>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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