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구의 문틈으로 보는 금융경제]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광고카피가 있었다. 올해엔 실로 많은 직장인들이 해외로 떠날 듯하다. 5월과 10월초 긴 연휴가 생긴 까닭이다. 1980년대 후반까지도 국내에선 개인의 해외관광여행이 허용되지 않았다. 해외 근무도 흔하지 않았다. 외교관 등 공무원을 제외하고 해외근무가 가능한 직장은 종합상사나 은행, 대규모 건설회사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은행의 해외근무는 대단한 빽을 갖고 있거나 핵심인재로 알려진 소수만이 누리는 특권으로 여겨졌다. 종합상사 해외근무자의 경우 판매실적에 따른 결과가 투명하게 드러나 스트레스가 심했다. 자연히 은행 해외지점 근무자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국내은행 해외지점이나 사무소 근무자의 경우 실적보다는 본점에서 오는 높은 분들이나 해외방문 정관계 인사들을 얼마나 잘 모시느냐가 출세의 지름길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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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계은행에서 근무할 당시 주요 거래처는 국내 유수의 재벌들이었다. 해당회사들을 분석할 때는 해당산업의 대표적인 기업의 재무뿐만 아니라 설비나 생산성 등 비재무 부문까지 비교해야 했다. 1990년대 중반까지도 재무구조뿐만 아니라 기술수준이나 설비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세계 굴지의 기업들과 격차가 커서 국내기업이 세계 최고수준에 도달하는 날이 온다는 기대조차 하기 어려웠다. 당연히 우리나라가 일본에 비해 몇 년, 미국에 비해서는 몇 년이 뒤진다는 말들이 공공연하게 오갔다.

외환위기를 극복해내며 우리나라의 위상은 대내외적으로 상당히 올라갔다. 삼성전자가 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 세계1위 자리를 차지하고 스마트폰에서도 엄청난 실적을 거두는 등 몇몇 산업분야에서 우리 기업들이 보여준 성과는 괄목할 만하다. 제조업은 뛰어난 기술을 바탕으로 잠재수요만 찾아내면 본국의 경제규모를 뛰어 넘어 세계시장에 도전하는 기회가 열려있다. 노르웨이란 작은 나라의 한계를 벗어나 한 때 세계시장을 주름잡았던 노키아를 비롯해 작은 나라에서도 해당분야 세계1등으로 뻗어간 회사들은 여러 개 된다. 이에 비해 은행업은 본국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다.

금융에서는 스위스를 제외하고 대체로 본국 경제규모의 제약 아래 놓이게 된다. 스위스의 경우 ‘예금자비밀보호’ 은행이라는 명성의 영향으로 보인다. 미국 최대은행인 JP 모건체이스의 2015년 연차보고서에 의하면 은행권 총자산을 본국 국내총생산과 대비한 자료가 나온다. 주요국 중 영국이 350%로 가장 높고 미국은 120%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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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에서는 왜 삼성전자 같은 세계적인 은행이 나오지 않느냐는 소리가 많다. 금융당국을 비롯해 주요 금융지주사마다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려야만 한다고 아우성이다. 얼핏 보면 국내은행의 해외영업 비중이 선진국 주요은행보다 낮아 그런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국내은행의 해외점포 수익은 2.9%인데 비해 시티은행은 54.9% ,HSBC는 21.7%, 일본계은행들이 20%내외라고 한다.(2015년 9월 21일 헤럴드경제) 2015년 기준 신한은행은 10% 정도로 알려졌다.

미국 시티은행은 해외진출에 명운을 걸고 오랫동안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지금의 입지를 구축했다. 1980년대 미국의 지방은행들도 경쟁적으로 해외로 진출했다가 엄청난 손실을 보고 철수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오기 8년 전 카나다로얄은행은 해외점포 전략을 대폭 수정, 미국 영국 호주를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철수했다. 당시 해외지점의 성과는 무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본점에서 영어권 3국을 제외하고 각 나라에 대한 깊이 있는 정보가 부족하고 이를 뒷받침할 충분한 인력이 없는 상태의 위험성을 깨달은 결과였다. 8년 후 불어닥친 세계 금융위기에도 카나다로얄은행은 세계적으로 드물게 AA란 신용등급을 유지했다.

일본경제가 잘나가던 1980년대에 규모면에선 일본계은행들이 세계10대 은행에 다수 자리 잡았지만 질적으로 10대은행의 명성에 올라갔던 일본은행은 하나도 없었다. 지금은 중국은행이 자산규모면에서 1980년데 일본은행과 비슷하지만 질적인 면에선 거리가 멀다.

프랑스의 대표격 은행인 BNP파리바그룹 은행의 간부급연찬회에서 CEO가 강조한 말이 생각난다. “영어를 본토인처럼 구사하지 못하는 직원은 BNP에서 미래의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게 그것이다. 그의 메시지를 떠올리며 국내은행 중 해외진출을 확대할 준비가 제대로 돼 있는 은행이 어디인지 궁금해진다. “남이 장에 간다 하니 거름 지고 나선다”는 옛말도 생각난다. 해외시장 진출을 강조하는 은행들은 무작정 점포를 늘리기보다 사전 준비 정도부터 꼼꼼히 챙겨야 한다. [오피니언타임스=김선구]

 김선구

 전 캐나다 로열은행 서울부대표

 전 주한외국은행단 한국인대표 8인 위원회의장

 전 BNP파리바카디프생명보험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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