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현의 문화로 만나는 세상]

세상은 영웅을 기다린다. 난세(亂世)일수록, 막막한 세상일수록, 정의가 점점 힘을 잃을수록 더욱 간절하다. 보통사람들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세상을 영웅이 바꾸어주길 바란다.

인류역사에는 수많은 영웅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위기에 처한 세상을 구했고 인류를 구원했다. 그들의 존재야말로 인류에게는 큰 위안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우리가 원할 때마다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이따금 그리울 때, 필요할 때, 역사 속의 잠든 그들이라도 다시 불러내는 것이다.

난세일수록 사람들은 영웅을 기다린다. ©네이버영화/픽사베이

이미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나왔는데, <명량>이 성공할 수 있겠느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김한빈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막막한 세상 속 영웅이 안 나타나서 역사 속의 영웅 이순신을 데리고 왔다”고.

없으면 상상력을 발휘해서라도 영웅을 만들어내야 할 판이다. 신화 속의 영웅들이 그렇고, 영화와 드라마, 만화의 슈퍼히어로들이 그렇다. 허구이지만 그들에게 감정이입을 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대리만족을 얻고 싶은 세상이니까. 나약하고 용기 없고 특별한 능력이 없어 스스로는 세상을 구하거나 바로잡을 수 없는 보통사람들의 로망이자, 환상이다.

물론 신화에서든, 드라마와 영화에서든, 아니면 실제 역사에서든 그 영웅들도 시대에 따라 모습과 역할이 다르다. 그래서 <신화의 힘>의 저자 조셉 캠벨은 “영웅은 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천의 얼굴을 그러냈다. 스파이더맨이나 다크맨같은 변종까지.

그러나 아무리 상상으로 그럴듯한 영웅을 만들어내도 잠시일 뿐, 허망하다. 현실에서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이순신 장군을 다시 불러내도 지금의 세상을 바꾸거나 구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 존재하지도 않는, 살아있지도 않은 영웅을 더 이상 기다리지 말자. 차라리 특출한 능력이나 재능도 없지만 살아있는 평범한 인간에게 기대를 걸어보자. 나부터 한번 나서서 불의와 부패에 맞서보는 것은 어떨까. 혼자 안 되면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 막 끝난 드라마 <김과장>의 주인공 김성룡 과장처럼.

배우 남궁민(오른쪽)과 이준호가 ‘김과장’ 제작발표회에서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포커스뉴스

일개 경리과장이 거대 자본권력과 그에 빌붙어 괴물이 된 인간들에게 맞서 싸운다는 것이 가당하기나 한 일인가. 정말 드라마 같은 이야기다. 어쩌면 <김과장>이야말로 허구의 영웅들, 역사에서 부활한 영웅들의 이야기보다 더 황당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더구나 그가 맞선 세상은 허구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현실’이다.

분식회계로 비자금을 조성하고, 그것을 들춰내려는 내부 고발자를 탄압하고, 젊은 아르바이트생의 임금을 착취하는 대기업. 그들의 하수인이 되어 그것을 눈감아 주거나 도와주는 검찰. 탐욕에 사로잡혀 법과 정의를 팽개쳐버린 채 거짓을 진실이라고 우기는 권력자들.

이런 세상에서 힘없는 일개 과장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그러나 김성룡은 포기하지 않고, 때론 좌충우돌하면서 싸웠다.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언젠가는 계란이 그 바위를 뛰어넘을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이런 김 과장에게 우리는 빠져들었고, 마음을 함께 했고, 박수를 보냈다. 슈퍼히어로에게서 느꼈던 단순한 카타르시스가 아니다. 이제는 얼마든지 드라마가 아닌 현실이 될 수 있음을 비슷한 경험과 인물을 통해 확인했다.

드라마 <김과장>의 인기와 공감은 아이러니하게도‘반(反) 영웅주의’에 있었다. 그동안 지나치게 영웅에게 의지하려 했던 어리석음의 반복에 대한 반성, 영웅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모두의 양심과 용기 속에 있다는 자각 때문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우리에게 영웅은 필요 없다. 스스로 얼마든지 세상을 바꾸고, 법과 정의를 바로 세운다. 너와 내가 영웅이고, 김 과장이다. 이제는 드라마가 아닌 현실에서도 김 과장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오피니언타임스=이대현]

 이대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

 전 한국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저서 <소설 속 영화, 영화 속 소설>,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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