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객 인터뷰]

1960년 4월19일 오후 1시40분경 경무대(현 청와대) 앞.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를 규탄하는 시위대를 향해 무장경찰들이 수백발의 총탄을 정조준 발사합니다. 순간 시위대 앞에 있던 대학생들이 피투성이가 돼 쓰러지고 바로 뒤 서울 동성고 학생들이 총탄의 표적이 됩니다. 무차별 총격으로 경무대 앞 도로는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립니다. 이날 발포를 계기로 이승만 정권은 종말을 고하고 4.19 학생혁명은 완수됩니다.

4.19 학생혁명이 일어난지 57년. 경무대 앞에서 민주주의를 외쳤던 홍안의 동성고 학생들은 이제 70을 훌쩍 넘겼습니다. 당시 ‘무저항주의 데모’란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대 전위를 이끈 4.19 학생혁명의 주역, 변우형 전 스포츠서울 사장(당시 동성고3)을 오피니언타임스이 만났습니다.

1960년 4.19 당시 동성고 시위대가 ‘무저항주의 데모’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변우형(사진 맨 오른쪽), 신홍섭, 현인남 등 동성고 학생들. ©‘4.19혁명의 최선봉-동성고’
1960년 4.19 당시 동성고 시위대가 ‘무저항주의 데모’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변우형(사진 맨 오른쪽), 신홍섭, 현인남 등 동성고 학생들. ©‘4.19혁명의 최선봉-동성고’

4.19 전날의 분위기는 어떠했습니까?

“자유당 정권의 독재와 부패로 불만들이 가득했지요. 3.15 부정선거와 김주열군 사망 등 일련의 사건들이 국민에게 실망과 분노를 안겼습니다. 그러던 것이 4.18 고려대 시위로 이어졌고 천일백화점 앞에서 쇠뭉치와 몽둥이를 든 조직깡패들이 고려대 데모대를 습격하는 일이 벌어져 사태가 극도로 악화됐습니다. 그 소식이 알려지면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분위기가 고조됐습니다. 전 국민을 들끓게 한 기폭제가 된 것이죠. 이런 분위기가 고교생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전해졌습니다. 무언가 터질 것 같은, 화산폭발 직전의 마그마와 같다고나 할까…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4.19 당일날 시위에 참여하게 된 과정을 자세히 설명해 주시죠.

“아침부터 전날 깡패들의 고대생 습격사견으로 사회 전체가 뒤숭숭했습니다. 무슨 큰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였죠. 막연한 불안감이 국민 모두에게 있었다고 봅니다. 등교하는 학생 입장에서야 더 더욱 불안했지요. 그날도 등교는 했지만 어수선해서 공부할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대학입시를 준비해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고3으로서의 불안감도 함께 작용했지요.

아침 수업이 시작되기 전부터 고3 각 교실에서 ‘어떻게 할 것이냐’ 등등 웅성대기 시작했습니다. 첫 1교시 수업 때부터 밖에서 시위소리도 들려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흰 가운을 입은 서울의대생들은 이미 데모를 시작했고 다른 대학들도 나왔다는 등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1교시가 끝나자 ‘이래선 안된다’ ‘가만히 있으면 안되겠다’는 생각들을 누구나 하게 됐어요. 운동장에 모여서 의논하자는 의견들이 나왔고 여기에 전교생이 너나없이 학교 뒤 운동장에 모였습니다. 누가 주도할 새도 없이 자발적인 움직임이었지요. 당시 동성중·고등학교 1학년부터 3학년이 모두 모였는데 학교 측에서 중1은 입학한 지 얼마 안되니까 빠지라고 했습니다. 고3를 중심으로 운동장에서 ‘나가자’ ‘안된다. 위험하다’ 등등 격렬하게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진행됐습니까?

“저의 경우 나가자고 주장했습니다. 다른 친구들도 동조하고… 그러나 일부는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위험하다는 것이었죠. 어쨌든 고3학생들 중심으로 그렇게 갑론을박하다가 나가기로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그래서 짧은 시간이지만 일부 친구가 플래카드를 만들고 일부는 학교정문 앞에서 시위대를 구성하고 대오를 만들었습니다. 대오를 절대 이탈하지 말자!고 결의하고 서로를 격려해 가며 일사분란하게 움직였습니다. 우리 고3이 맨 앞에 서고 뒤이어 고2, 고1 등 학년별로 따라오게 했습니다.”

플래카드를 그렇게 짧은 시간에 만들 수 있었나요?

“운동장에서 교문까지 나오는 동안에 시간이 걸렸어요. 나가자~ 나가지 말자~ 선생님들도 일부는 나가라~ 말아라~ 그러는 사이 글을 잘쓰는 친구가 커튼을 북~ 뜯어서 쓴 겁니다.”

경무대 앞에 도착한 시위대가 발포 준비를 마친 무장경관들과 대치하고 있다. ©‘4.19혁명의 최선봉-동성고’

당시에도 동성고 학생들은 얌전하고 조용하다는 평가가 많았었죠?

“정치적이지 않고 조용한 편이었습니다. 큰 말썽 부리지 않고 공부 열심히 하는 학생들로 알려져 있었지요. 그러나 옳지 않는 일에 대해선 자기주장을 분명히 하는 편이었습니다.”

당시 동성고 시위대의 경우 시위대 옆에 선생님들이 끝까지 따라오셨는데… 선생님들 성향은 어떠했습니까?

“당시 어느 학교도 마차가지였겠지만 자유당 정권에 대한 불만이 높았습니다. 동성고도 예외가 아니었죠. 특히 장면 총리가 동성고 교장출신이어서 다른 학교보다는 정부에 비판적인 시각이 강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생님들도 대체로 정치성이 좀 강한 편이었구요. 그날도 선생님들 대부분이 시위대 옆에서 따라왔습니다. 아마 시위대 옆을 선생님들이 따라다닌 학교로는 동성고가 유일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학생들만 시위현장에 내보내는 것이 걱정되시고, 또 본인들도 학생시위에 동조하는 입장이어서 따라오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선생님들의 비판적인 성향이 동성고 학생들에게도 물론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4.19때는 선생님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교장선생님이 반대하시지는 않았는지요?

“교장선생님 역시 당시 자유당 정권에 비판적이셨습니다. 교장 선생님의 영향을 선생님들이나 학생들이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교장선생님은 그만두시고 장면 정권에서 활동하셨습니다.”

당시 장면 박사와 동성고는?

“동성고에 대한 장면박사의 영향력은 컸다고 봅니다. 1936년 동성고 교장으로 취임해서 17년간 재직하셨던 분이니까요.”

동성고가 시위대의 선봉에 나선 데는 장면박사나 선생님 외에 천주교의 영향도 있었지 않습니까?

“동성고 재단이 천주교입니다. 당시 도덕선생님이 최석호 신부님으로 아주 엄하셨지요. 천주교 재단의 학교라는 점이 사회비판적인 학풍에 음으로 양으로 작용했다고 생각됩니다.”

‘동성 4.19혁명백서 편찬위원회’가 펴낸 ‘4.19 혁명의 최선봉-동성고’라는 책자에서 보면 당시 동성고의 데모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것처럼 기술돼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들어보니 사전계획된 것이라기보다 당시 사회분위기와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교사들의 사회비판적인 성향에 영향받은 학생들의 자발적인 행동으로 보입니다만…

“그렇습니다. 사전 계획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당시 시위대의 주역이었던 고3생들 누구도 사전계획설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앞서 얘기했지만 4.19전날 고대생 습격사건이 시위를 폭발시킨 직접적인 계기가 됐지요. 당시 시위를 주동했던 고3학생들은 대학입시를 준비해야 하는 처지여서 사전에 시위나 데모를 계획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 못참겠다는, 그야말로 자연발생적인 시위였습니다.

이미 발간된 ‘4.19 혁명의 최선봉-동성고’에서 기술된 몇사람의 사전계획설은 완전 조작된 것입니다. 대학입시를 준비하면서도 당시 사회에 대한 울분이 쌓여 방과 후 귀가 길에 친구들끼리 울분을 토로하거나 이러면 안되겠다는 얘기들은 물론 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시위를 어떻게 하기로 구체적인 사전계획을 세웠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사전계획설을 주장한 친구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 바 있지만 그런 생각은 당시 누구나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전계획을 했다고 하는 다른 친구도 동성 80년사에 게재하기 위해 회고기사를 작성할 때 당시 전창기 교장선생이 ‘이왕 쓸려면 좀 그럴듯하게 해야 하지 않느냐’고 해서 자신들을 등장시켰다고 변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잘못된 내용을 시정하기 위해 ‘동성 4.19혁명사’를 재발간할 계획입니다. 확실하게 정정돼야 한다는 것이 당시 고3생들의 생각입니다.”

변우형 전 스포츠서울 사장

당시 시위사진을 보면 고3 변우형 학생 등이 '무저항주의 데모'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맨 앞에서 들고 서있습니다. 맨 앞에 섰던 이유는?

“학교 운동장에서 긴장과 흥분 속에 나가자고 했지만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주춤주춤했습니다. 대오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누가 앞장서야 되는지도 전혀 계획이 없어 말만 많았을 뿐 진행이 어려웠습니다. 더욱이 당시에는 각 경찰서 형사들이 학교주변을 감시하는 상황이어서 나선다는 일이 무섭기도 했지요, 솔직히 겁났습니다. 그러던 중 제가 가까운 친구들에게  ‘앞장서자!’고 얘기했습니다. 마침 한명이 플래카드를 급히 만들어 갖고 와 그걸 받아 앞장서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든 플래카드 뒤로 데모대가 질서를 갖추게 됐습니다.

맨 앞에 섰기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무척 불안했습니다. 전날 고대생 습격사건이 있었던터라 비슷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또 연행될 지도 몰랐으니까요. 그러나 플래카드(무저항주의 데모)를 들었기에 앞으로 나가야겠다는 일념뿐이었습니다. 플래카드를 한번도 놓치지 않고 경무대 앞까지 한발 착오없이 갔습니다. 발포순간까지 붙잡고 있었지요. 동성고의 4.19혁명은 전위대가 시위대를 흔들림없이 리드함으로써 성공했다고 봅니다. 그 점 지금도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경무대까지 나아가는 데 어려움이 적지 않았을 텐데요.

“우리 동성고 시위대는 혜화동에서 왼쪽 서울대쪽으로 틀었습니다. 그리곤 종로5가에서 종로통으로 나갔지요. 순간순간 공포감이 엄습해왔습니다. 시내는 데모가 물결을 이루고 시위대의 함성소리로 요란했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는 학생들에게 먹을 물을 갖다주는 등 시위군중에 대해 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원과 응원이 있었습니다. 시위 도중에 어느 대학교가 시위에 참여했다더라, 참여 고등학교가 늘었다더라 등등의 소식이 들려와 시위열기가 하늘을 찌를듯했지요. 고등학생인 우리들은 그저 경무대까지 가야한다는 목표로 전진해갈 뿐이었습니다. 긴장과 흥분으로 땀이 비오듯했지요.”

경무대 앞 상황은?

“경무대 앞에 도착하니 학생들로 차있었습니다. 동성고 앞에 동국대 대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플래카드를 잡고 있는데 갑자기 총소리가 ‘빵!~’하고 났습니다. 그러더니 카빈소총소리가 ‘따다닥…’하며 총탄이 우리 쪽을 향해 날라오는 것이었습니다. 총알이 아스팔트를 맞고 튕겨져 날아올랐습니다. 지금도 귀에 선합니다.  앞에 있던 대학생들이 순식간에 길 양옆으로 피신하고 우리만 남게 됐지요. 총격을 가하는 경찰과 동성고생들이 마주보고 대치하는 상황이 된 겁니다. 그때 어디선가 ‘엎드려’하는 소리가 들려 땅에 엎드렸죠. 아마도 선생님이 외치신 게 아닌가 합니다. 총 맞은 친구들도 있고…옆에 있는 친구 가슴에 머리를 들이박고 순간을 견뎌야 했습니다. 어이쿠! 윽! 하는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습니다. 정말로 무서웠습니다. 죽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잠시 뒤 총소리가 멈추는 듯해  이때다 싶어 모두 일어나 피했습니다. 대오는 흩어져 뿔뿔이 돌아섰습니다. 다들 기진맥진한 상태였죠. 생사가 이렇게 갈리는 구나! 무서운 생각뿐이었습니다. 각자 흩어져 효자동에서 혜화동 학교로, 또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광화문에서 시청쪽으로 걸어가다보니 마침 서울신문이 불타고 있더군요. 학교로 돌아갔습니다. 돌아오는 길도 시위대로 인산인해를 이뤘습니다. 자유당을 규탄하는 목소리로 가득찼습니다. 그날 저녁 낮에 겪은 총격현장 때문에 밤새 끙끙 앓았습니다.”

이후 학교는 언제쯤 안정이 됐습니까.

“당시 학교수업을 도저히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요. 일부를 제외하고 다음날 등교했으나 계엄령으로 10일 동안 학교는 휴교조치됐습니다. 그 뒤 4월25일 서울에서 대학교수들이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고 쓴 플래카드를 앞세우며 시위를 벌인 것이 자유당정권 종말의 계기가 됐지요. 4월26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성명으로 사회는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고 학교수업도 재개됐습니다. 그때서야 고3인 우리들도 대학입시 준비에 열중할 수 있었지요.”

다른 하고 싶으신 말이 있다면?

“이미 출간된 ‘첫번째 동성고 4.19백서’는 몇명이서 사전계획아래 동성고 시위를 주도했다는 거짓증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새로 책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몇명의 사전계획설과 관련해서도 ‘그런 생각을 했으나 실제로 추진한 것은 없다’고 밝혀져 다시 백서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앞서 설명한대로 당시 상황이 심각했고, 불의를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동성학생 모두가 자발적으로 사전계획없이 시위에 참여한 것입니다.

시위가 성공한 배경에는 서둘러 플래카드를 만들거나 학교선생님들이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끝까지 시위대 옆을 따라 붙었던 여러 정황들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특히 맨 앞에서 플래카드를 들고 끝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앞장선 전위대의 노력이 시위성공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기획된 것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으로 이뤄진 행동이었고 이래선 안되겠다는 고등학생들의 의지가 모여서 효자동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사전기획을 한 주동자는 없지만 그날 학생들의 의지를 한데 모아 일사분란하게 행동으로 옮기게 한 우리 모두가 주동자라면 주동자지요. 그날 앞장서 중학생까지 이끌고 간 동성고 고3의 리더들이 동성고 4.19혁명의 주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피니언타임스=권혁찬]

*인터뷰는 2017년 2월14일과 4월12일 두차례에 걸쳐 진행됐습니다. 서울 종로3가 피카디리 극장 옆 카페에서 4.19 당시 시위에 참석했던 주인공의 구술 아래 생생한 역사를 되짚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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