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세진의 지구촌 뒤안길]

지난 8일 실시된 영국 총선에서 테리사 메이 총리의 집권 보수당은 종전의 과반의석을 잃었다. 영국 조기총선은 메이 총리가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 협상력 강화를 위해 의석수를 늘리고자 실시했다. 그러나 영국 민심은 메이에게 등을 돌렸다. 보수당이 야당 노동당에 패한 곳에는 런던 서부 켄싱턴 지역도 포함됐다. 노동당이 켄싱턴 선거구에서 승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 배경에는 당국이 자신들의 의견을 무시한다는 주민들의 불만이 자리잡고 있다.

14일 영국 런던에 있는 27층 그렌펠아파트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해 건물 전체가 불에 휩싸여 있다. ©BBC 캡처

지난 14일 발생한 런던 고층아파트 화재는 이를 다시 한번 입증했다. 불이 난 그렌펠 아파트는 바로 켄싱턴 지역에 있다. 16일 오전까지 17명이 숨진 것으로 집계됐지만 사망자 수가 얼마나 늘어날 지 알 수 없다. 실종자도 많아 사망자가 100명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처음 화재가 발생했을 때 주민들을 공포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공포는 곧 분노로 바뀌었다. 그렌펠 아파트 주민들은 몇년 전부터 아파트의 화재안전 설비가 충분치 못하다며 개선을 요구했었다. 그러나 주민들의 요구는 늘 묵살됐고 결국 대형 참사를 불렀다. 불만은 주민들의 목소리를 들으려조차 않은 당국을 향하고 있다. 보수당이 처음으로 켄싱턴 선거구에서 패한 이유를 충분히 설명해준다.

그렌펠 아파트는 런던에서도 부촌으로 유명한 켄싱턴 지구에서 빈곤층이 몰려 사는 공공임대주택이다. 초고가 호화 저택들 옆의 공공임대주택은 빈부 격차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인구는 급속히 늘어나는데 이를 뒷받침할 주택 공급은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니 이같이 값싼 공공임대주택 제공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화재로 큰 인명피해가 나자 빈곤층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고 무시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빈부의 극심한 양극화는 이미 전세계적 현상이지만 이번 화재는 영국에서 빈부 격차에 따른 신분 대립과 갈등이 사회문제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비단 영국 만이 아니라 전세계적 문제이기도 하다.

화재 원인은 무엇이고 또 어떻게 불이 순식간에 24층 건물 전체로 번졌는지 등이 완전히 밝혀지기까지는 오랜 조사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주민들이 오래 전부터 화재 발생에 대한 불안을 호소했는데도 개선 요구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은 점은 이번 참사가 예견됐던 비극임을 보여준다. 또 주민들의 거듭되는 개선 요구를 묵살한 영국 당국의 처사는 영국 내에도 안전불감증이 깊이 뿌리박혀 있다는 증거다.

실제 그렌펠 아파트에서는 화재 당시 경보도 울리지 않았다. 요즘 모든 건물들에 필수적인, 화재 확산을 막기 위한 스플링쿨러조차 설치되지 않았다. 비상탈출구로 쓰일 계단도 중앙에 단 하나밖에 없었다. 이런 모든 것들을 고쳐달라고 주민들이 수년 간 요구했지만 허사였다. 조사를 통해 밝혀져야 할 문제이지만 지난해 끝난 건물 리모델링에서 아파트 외장재로 불에 잘 타는 자재가 사용돼 불이 급속히 확산됐다는 의혹은 이번 화재에서 최대 쟁점으로 부상할 것으로 보인다.

그렌펠아파트 관리업체는 주민들에게 배포한 안내문을 통해 ‘방 안에 남아 기다리라’(stay put)는 안전지침을 내린 것으로 알려져 세월호와 판박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사진은 뭍으로 나온 세월호와 뻘로 뒤덮인 선체 내부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

이러한 안전불감증과 관련해 우리는 이미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2014년 300명이 넘는 희생자를 낳은 세월호 참사의 기억이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도 비슷하지만 불이 났는데도 ‘방 안에 남아 기다리라’(stay put)는 안전지침이 내려졌다는 대목에서는 어쩌면 세월호 침몰 때와 이같이 비슷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까지 들어 놀랍다. 영국 BBC는 ‘stay put’ 지침은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층 건물의 경우 불이 나더라도 다른 층으로 확산되기 전 그 층 자체에서 진화될 수 있도록 건축되기 때문에 화재가 난 층이 아니라면 방 안에서 기다리는 게 더 안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화재가 확산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일 뿐 그렌펠 아파트처럼 급속히 화재가 확산됐을 때에는 아무 소용도 없다. 그렌펠 주민들은 대부분 이러한 지침을 무시했다는 점이 세월호 희생 학생들과 다른 점이다.

영국에는 그렌펠 아파트처럼 화재에 취약한 고층건물들이 수없이 많다. 영국은 이번 화재에서 드러난 문제점들을 바로잡기 위해 고층건물들에 대한 일제 점검을 벌이기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커다란 희생을 치르고 나서야 뒤늦게 개선이 이뤄진다는 것도 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재난 발생 시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것은 국가의 몫이기도 하지만 국민 스스로 책임져야 할 부분도 분명히 있다. 그렌펠 아파트 주민들은 오래 전부터 스스로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목소리를 내왔다. 다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참극이 일어난 것이다. 이는 반드시 고쳐져야 할 문제이다. 서로의 생각이 통하지 않으면 문제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문재인 대통령을 탄생시킨 촛불 민심에서 분명히 지켜봤다. 소통을 내세운 문재인 대통령도 런던 고층 아파트 화재를 주의깊게 분석하고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오피니언타임스=유세진]

 유세진

 뉴시스 국제뉴스 담당 전문위원

 전 세계일보 해외논단 객원편집위원    

 전 서울신문 독일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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