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완의 애! 쎄이]

[오피니언타임스=우디] 단기직으로 잠시 공공기관에서 일을 했었다. 스트레스를 굉장히 많이 받은 어느 날, 퇴근하고 친구를 만나러 번화가로 나갔다. 버스에 내려서 약속장소로 걸어가는 순간이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이 나를 툭 치고 갔고, 교복을 입은 몇몇 아이들이 꺄르르 웃으며 내 옆을 지나갔다. 어떤 아저씨는 통화를 하며 걸었고, 운동복 입은 여자는 빠른 걸음으로 나를 아주 살짝 스쳤다.

일상적이고 아주 평범한 스침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웅성거리는 소리에 한쪽 손을 들어서 귀를 막고, 어깨에 멘 가방 줄을 부여잡으면서 몸을 움츠렸다.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견디기 힘들었다. 사람들의 작은 스침이 너무 아프고 무서워서 몸을 피했다. 그렇게 갑자기 몸을 움츠리고 귀를 막으며 걸어가는데 이건 너무 이상한 것 같았다. 정말 이상했다.

©픽사베이

얼른 친구가 기다리는 식당으로 들어가 밥을 먹으며 말했다. “나 지금 이상한 경험을 하고 왔어. 갑자기 사람 많은 게 너무 아프고 무서웠어.” 내 얘기를 차분하게 듣던 친구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많이 힘들어서 그래, 나도 그럴 때 있어. 그렇게 시작된 친구의 얘기도 나와 많이 다르지 않았다. “아침에 지하철을 타면 계속 사람들이랑 어깨를 스치고, 옆 사람 가방에 짓눌릴 때가 있어. 근데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이 사람들을 다 밀쳐버리고 넘어뜨리고 싶다고. 가방 한 번이 스친 건데 커터 칼이 스쳐지나간 것처럼 팔뚝이 아팠어. 나는 여기 존재하는데 아무도 내가 여기 있는 걸 존중하지 않는 것 같더라.”

친구의 담담한 얘기를 차근차근 들으면서 나는 어떤 고통을 떠올렸다. 넘어질 때 바닥을 짚어서 생겨버린 손바닥의 까진 상처, 살갗이 벗겨져서 무엇이 닿아도 따가운 상처. 왠지 우리가 느끼는 이 고통이 그 상처와 닮아있는 느낌이 들었다. 나와 친구는 살갗이 모두 까져있어서 세상의 소리 하나, 눈빛 하나에도 쓰라리고 따끔거려서 버틸 수 없는 상태인 것 같았다.

나와 타인 간에 최소한의 안전거리는 존재한다. 처음 보는 사이에 어깨를 맞대고 앉지 않는 것처럼, 대중교통에 앉아서도 옆 사람과 최소한으로 유지하는 거리. 처음 보는 사이에 욕을 하거나, 반말을 하거나, 나의 은밀한 취미를 공개하진 않는 것 같은. 그런데 두 번 본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거리가 좁혀지는 것일까? 세 번 본 사이에는 얼마만큼. 그리고 내가 그 사람보다 경험과 나이가 많으면 거리를 좁히는 주도권은 나에게 있는 것일까? 반대로 내가 그 사람보다 철없고 어리면 주도권을 잡는 걸까?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설명서가 있는 영역도 아니었다. 그런데 왠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 애매모호한 거리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하기보단 점점 고민하려 하지 않고 무감각해지고 무례해지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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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활을 하면 가끔씩 개인이 가지고 있는 얇은 안전막을 드릴로 뚫고 망치로 부수는 것 같은 상황에 놓이곤 한다. 나의 업무를 모두 마치고 커피를 타서 자리에 앉으니, 선배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잔업을 넘겨줄 때. 그 일은 선배님의 일이지 않냐고 물어보면, 정도 없고 융통성도 없다고 한 소리 들을 때. 여자는 관리를 꾸준히 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말을 들을 때. 나의 취미를 보고 ‘그런 게 재미있나요?’라고 되물을 때. ‘그 학벌에 왜 이곳에 와서 일을 하는 거죠?’라는 물음을 들을 때. 면접에서 ‘결혼은 언제쯤 할 건가요’라고 물을 때. 애사심을 강요받거나 처음 본 선배한테 술 따르고 90도로 인사해야 할 때. 나의 결정을 공개하고 강요받아야 할 때.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도 점심을 같이 먹어야 할 때…….

우리 사회는 집단과 공동체에 익숙한 사회였다. 획일적인 것이 높게 평가되었고, 개성보다는 안정성이 중시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개인의 영역이라는 것은 그리 중요한 주제가 아니었다. 모든 개인은 독립된 공간과 생각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존중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아무렇지 않게 서로의 세계를 침범하고, 타인의 영역을 부수고, 사소한 말로 타인의 살갗을 모두 벗겨버린다. 가끔 나는 지금 우리 사회의 모두가 개인의 안전막이 부서지고 온몸이 발갛게 까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 상상 속의 모습은 징그럽고 참혹한데, 우리 현실 사회 역시 똑같이 징그럽고 참혹하다. 갑자기 화가 난다고 사람을 때리고, 알바생을 쉽게 무시하고, 계산을 할 때 카드를 던지고, 층간소음으로 칼부림이 난다.

살갗이 모두 까진 사람들은 매일 아프다. 지하철을 타도, 회사에 출근해도, 회식을 해도, 카페에 앉아 있어도, 길을 걸어가도. 살갗이 까진 사람들에게는 여유라는 것이 없다. 바람 한 올도 너무나 아프다. 나의 생존만이, 가족의 생존만이 목표이다. 내가 아프니까, 아팠으니까 나의 화풀이는 정당화된다. 이렇게 우리 사회는 매일 매일 빠른 속도로 병들어 가고 있다.

언제까지 이렇게 아파야 할까, 언제까지 우린 스스로 아픈 걸 자각하지 못할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사실, 우리 사회는 꽤나 열심히 소리를 지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불평등에 대해서 얘기하고, 공공연한 혐오와 차별에 대해서 얘기하고, 너는 지금 모르겠지만 사실 너는 굉장히 아프고 무지한 상태야 라고 소리를 질러주고 있다. 우리 이제 더 이상 이렇게 아파하면서 살지 말자고 말이다. 아픈 것을 인정하기란 두려운 법이다. 눈에 보이지 않던 상처가 눈앞에 들이밀어지면 그 쓰라림은 더욱 커진다. 그래도 우린 마주 봐야 한다. 이 상처들을. 살갗이 까져서 아픈 때를 기억하고 변화해야 한다. 아파서 귀를 막고 눈을 감고 방으로 숨어들어가기 전에, 너무 아파서 타인을 모두 밀쳐버리기 전에. 

 우디

 여행, 영화, 글을 좋아하는 쌀벌레 글쟁이.
 글을 공부하고, 일상을 공부합니다.
 뛰지 않아도 되는 삶을 지향합니다.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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