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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의 후손과 이명세의 후손[이상요의 미디어 속으로]
이상요 | 승인 2017.08.07 11:25

[논객닷컴=이상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교수] 몇 년 전 북한산 둘레길이 완성될 무렵, 지인들과 둘레길을 완주해 보기로 했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나는 북한산 등산을 몇 차례 하기는 했지만 전체를 다 둘러보지는 못했다. 둘레길을 완주하면 켜켜이 쌓여있는 서울의 역사적 이미지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둘레길 1, 2 구간부터 시작했다.

삼각산, 봉황각, 그리고 순국선열묘소들

이 구간에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들과 순국선열들의 묘소가 즐비했다. 3·1운동을 주도했던 의암 손병희 선생의 묘소와 3·1운동을 계획했던 봉황각, 서라벌중학교 후문 옆에 있는 몽양 여운형 선생 묘소, 초대 부통령을 지냈던 성재 이시영 선생 묘소와 광복군 합동묘 외에도 일성 이준 열사, 가인 김병로, 동암 서상일, 심산 김창숙, 상산 김도연, 해공 신익희와 아들 평산 신하균, 강재 신숙, 안중근 의사의 딸로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안현생의 묘소, 4·19 국립묘지 등이 이 구간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가는 곳마다 탐방안내원이 스마트폰에 저장된 애국가를 울려주는 동안 묵념을 올렸다. 왜 수유리와 우이동 산자락에 이분들의 묘소가 이렇게나 많이 모여있는지 탐방안내원에게 물었더니 ‘이곳 지기가 세다’고 들었단다. 서울에서 삼각산을 가장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곳이 봉황각 경내인데, 수려한 삼각산 줄기가 내려와서 둥지를 틀어 기운이 내려앉는 곳, 봉황이 내려앉는 곳이라고 해서 봉황각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말을 듣고 삼각산을 바라보니 고개가 끄떡여졌다.

3·1운동 발원지 봉황각 ©강북구청 공식블로그

방치된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의 묘소

이시영 부통령의 묘소로 올라가는 길은 경사각이 70도는 돼 보일 정도로 가팔랐다. 겨우 올라가 보니 묘소는 군데군데 뗏장이 뜯겨나간 채 관리되지 않은 흔적이 역력했다. 우당 이회영의 동생으로 조선조 말기의 권문세가였지만 조국이 주권을 침탈당하자 가문에 속한 모든 노비들을 해방시켜주고 가산을 모두 정리하여 6형제가 독립 투쟁에 나선 집안. 그 많던 재산을 처분해 만주로 이주해 신흥무관학교를 건립하고 독립운동가를 길러냈으며, 고종 탈출까지 시도했고, 초대 정부 부통령까지 지낸 분의 묘소는 쓸쓸했다. 왜 국립묘지에 묘소를 마련하지 않았을까? 이승만과의 불화로 부통령직을 박찼기 때문일까?

동행했던 김현풍 전 강북구청장이 들러야할 곳이 있다면서 손을 잡아끌었다. 묘소로부터 150미터쯤 아래 허름한 집으로 안내했다. 붉은 기와지붕에는 검은 이끼가 잔뜩 내려앉고, 대문 옆엔 다 타버린 연탄 수십 장이 쌓여 있는 10평 남짓한 집이었다. 이집에 성재 선생의 둘째 며느리 서차희 여사가 건강이 악화된 셋째아들, 소아마비를 앓는 막내딸과 함께 살고 있단다.

인사차 방에 들렀더니 며느님과 딸은 점심식사 중이었다. 조그만 소반에는 밥과 구운 꽁치, 김치가 전부였다. 독립유공자 유족에게 지급되는 정부 지원금은 독립유공자 본인과 배우자에게만 한정되기 때문에 며느리 모녀와 아들은 국민기초생활수급자에게 지급되는 80여만원의 생활보조비로 산다는 것이다. 김현풍 전 구청장은 자기가 현직이었을 때는 매주 간호사를 보내 건강체크라도 하게 했단다.

가난에 시달리는 이시영 부통령의 후손들

성재 선생은 송곳 하나 꽂을 땅도 남겨주지 않았다고 한다. 한때는 서울 중구 일대 2만평 넘는 땅이 성재 가문의 재산이었으나, 선생은 전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모두 썼다. 선생이 부통령직을 그만둔 다음 날부터 식구들은 당장 끼니 걱정을 해야 했다.

선생의 큰 손자는 4살 때 상해에서 숨졌고, 둘째 손자 이종문은 경기중·고를 나와 성균관대 법정대에 합격했지만 등록금을 마련할 수 없어 결국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셋째 손자는 가난을 피해 캐나다로 이민을 갔으나 중병을 안고 10년 전 귀국해 서여사와 살았다. 큰 손녀는 경기여고·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캐나다로 이민 갔지만, 현지에서 작은 수퍼마켓을 운영하며 살고 있다고 한다. 가난에 시달리다 며느님도 타계하셨다고 들었다.

심산 김창숙의 묘소와 성균관대학교

여기에서 나와 조금 더 가면 심산 김창숙 선생의 묘소를 만난다. 심산 선생은 사드 배치 때문에 주민들의 반발이 끊이지 않고있는 경북 성주 출신이다. 심산은 평생을 독립운동과 반독재투쟁으로 일관했다.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 진정서를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하려 했다가 수백명의 유학자들이 체포되는 유림단사건을 주도했고, 김구 등과 협의해 의열단의 나석주를 파견해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파 사건을 일으켰다. 이런 일로 체포된 심산은 대전형무소 수감 중 고문으로 다리가 마비되어 앉은뱅이가 되기도 했다. 이승만 정권 때는 이승만 대통령 하야 경고문을 보냈다가 체포되어 수감된 일도 있다.

심산은 무엇보다 일제에 의해 폐교된 성균관을 되살리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일제가 패망하자 심산은 성균관 폐교에 동조했던 친일파 유림을 몰아냈다. 심산의 피와 땀 그리고 전국 600만 유림의 자금으로 1953년 성균관대학교가 마침내 인가되었고 심산은 초대 총장에 취임했다. 심산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성균관대학교는 없었을 것이다.

김창숙 선생을 성균관대학교에서 몰아낸 이명세

그러나 이승만의 독재 행각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던 심산은 이승만 정권의 보복에 시달려야 했다. 600만 유도회의 지도자인 심산을 제거해야 정권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이승만은 당시 시경국장, 치안국장을 역임한 윤우경과 이명세를 사주했다. 이들이 경찰과 자유당 정치 브로커들을 동원해 심산을 성균관대와 유도회에서 몰아내게 된다.

한길로 박사에 의하면 이명세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제의 하급관리를 거쳐 은행·금융업에 종사하다가 일제가 조직한 조선유도연합회 상임참사로 이름을 올리면서 친일유림의 거두로 부상한 인물이다. 일제는 민중에게 지도자적 입장이었던 유림의 도덕적 권위를 깨트리고 일제에 대한 유림의 종속성을 강화시키고자 했다. 이런 의도를 가진 일제에 의해 발굴되고 양성된 친일유림이 이명세였다.

‘징병제 실시를 축하하며’는 그가 남긴 한시 중 하나다.
해를 이어 북쪽을 토벌하고 또 남면을 정벌함에
이 사이 새로운 징병제 반도의 병사에까지 이르렀네.
내지와 외지 한 몸으로 여겨 균등히 은혜 주시니
앞뒤가 서로 응하며 의로운 함성 함께 외치네.....

해방 후 그는 이승만 독재세력과 협력해 ‘재단법인 성균관’의 상임이사를 맡으면서 독립운동가 김창숙이 중심이 된 ‘조선유도회총본부’를 와해시킨다. 재단법인 성균관 이사장은 이명세가, 총장은 이선근이 차지한다. 이명세는 친일인명사전 종교부문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뉴스타파는 최근 해방 70년 특별기획 ‘친일과 망각’을 방송했다. ©뉴스타파 캡처.

이명세의 후손과 공영방송

그의 손녀 이인호는 대학교 3학년에 미국으로 유학가 귀국한 후, 고려대와 서울대 교수를 거쳐 주핀란드 대사와 주러시아 대사를 역임하고, 현재는 KBS 이사장으로 재직중이다. 그는 조부의 활동에 대해 “일제가 요구하는 협력의 글을 쓰실 수밖에 없는 위치에 계셨지만 목표는 서양사조에 맞춰 유학의 영향력을 증대시키자는 데 있었다”고 말했다.

조부와 이인호를 연좌제로 묶을 수는 없다. 문제는 그의 역사관이다. 그는 백범 김구 선생에 대해 “대한민국 체제에 반대한 사람”,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교회 발언에 대해서는 “감동받았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낙마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 할 때라고 느낄 것”이라고 발언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에 대해서는 “역사 비판이 아닌 역사 왜곡이다”, “이건 완전히 국가에 대한 도전행위다”라고 말했다. 광복절 대신 건국절을 제정하자는 ‘건국60주년기념사업준비위원회’ 공동준비위원장을 지냈고,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를 지지하기도 했다.

지금 KBS 내부에서는 그가 이사장직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전국 213개 시민사회·언론·종교단체로 구성된 ‘KBS·MBC 정상화 시민행동’은 KBS이사회의 이인호 이사장과 조우석 이사, MBC의 최대주주인 방문진의 고영주 이사장과 김광동 이사를 적폐이사로 규정하고 이들의 파면을 요구하는 시민청원을 전개하고 있다. 이들은 이런 요구를 거부하고 있다. 해방 70년이 지났어도 일제 잔재의 뿌리는 넓고도 깊다. 

 이상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교수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보도교양특별분과 위원

  전 <KBS스페셜> 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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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요  leesy54@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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