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철의 석탑 그늘에서]

[오피니언타임스=서동철] 며칠 전 전라북도 고창 선운사에 다녀왔다. 이 유서깊은 절을 찾은 것은 그동안에도 여러차례였지만, 이번에는 취재가 주목적이었으므로 조금 더 꼼꼼하게 둘러봤다. 특히 과거에는 스쳐지나갔을 산신각 앞에서 머문 시간이 길었다. 정면 한 칸, 측면 두 칸의 이 작은 전각 내부에는 선운사의 창건 설화에 보이는 두 고승(高僧)이 산신이 되어 나란히 자리잡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백제 스님 검단선사(黔丹禪師)와 신라 스님 의운화상(義雲和尙)이다.

선운사 산신각의 검단선사(왼쪽)와 의원화상 ©서동철

그런데 창건 설화를 따라가다 보니 뜻밖에 검단선사가 서역 출신일 수 있겠다는 추정에 이르게 된다. 선운사 창건 설화는 이렇다. 본래 절터는 용이 살던 큰 못이었다. 검단 스님이 용을 몰아내고자 돌을 던져 연못을 메워 나가던 무렵 눈병이 돌았다. 그런데 못에 숯을 넣으면 눈병이 나았으니 사람들은 너도나도 숯과 돌을 가져와 큰 못이 금방 메워졌다.

그 자리에 세운 절이 곧 선운사다. 당시 절 주변에는 난민이 많았는데, 검단스님은 소금을 구워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일러 주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은덕에 보답하고자 봄·가을이면 절에 소금을 바치면서 보은염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민속학계는 이 설화를 막 전파를 시작한 외래종교 불교와 용이 상징하는 토속신앙의 경쟁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한다. 금속의 제련을 뜻하는 숯은 선진문화를, 자염은 생계 안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었다는 뜻이다. 정기적으로 부처님에게 공양을 드렸다는 것은 결국 포교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민속학적 해석에 귀기울이다 보면 검단스님은 자연스럽게 선진문화로 무장한 외래 포교자라는데 생각이 미친다. 검단이라는 이름부터가 그렇다. 검단은 글자 그대로 검고 붉다는 뜻이다. 혹시 검단이란 법명(法名)이라기보다는 그 용모의 특징을 호칭으로 대신한 것은 아닐까 궁금해졌다.

우리나라 불교 전래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이런 추측이 무리는 아니다. ‘삼국유사’는 ‘전진의 부견이 고구려 소수림왕 즉위 2년(372) 사신과 중 순도(順道)를 시켜 불경과 경문을 보냈다. 4년(374)에는 아도(阿道)가 동진에서 왔다. 이듬해(375) 2월에는 초문사를 세워 순도를 있게 하고, 또 이불란사를 세워 아도를 있게 했는데, 이것이 고구려 불법(佛法)의 시초’라고 적었다.

아도화상 사적비 ©문화재청

아도는 세월을 건너뛰어 신라 역사에도 등장한다. ‘삼국유사’는 신라에 불교를 전하러 온 아도를 소개했다. 비처왕(소지왕, ?~500) 때 아도화상(我道和尙)이 오늘날 선산인 일선군 모례의 집에 왔는데, 모습이 눌지왕(재위 417-458) 때 신라에 불교를 전한 고구려승 묵호자(墨胡子)와 비슷하다는 내용이다. ‘고승전’은 아도화상을 서천축(西天竺) 곧 오늘날의 인도 출신이라고 적고 있다.

한편으로 같은 ‘삼국유사’에 실린 ‘아도본비’(我道本碑)에는 아도(我道)가 고구려 사람이며, 불교를 전하고자 미추왕 2년(263)에 왔다고 했다. ‘아도본비’는 아도화상과 진흥왕 당시 순교해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는 계기를 만든 염촉(厭髑·이차돈)의 행적을 새긴 비석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아도가 여기저기 등장하니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도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일연은 ‘고구려 소수림왕 4년에 아도가 동진에서 온 것은 틀리지 않으나, 그 아도가 신라 비처왕 때 신라에 온 것은 100년 남짓 시간차가 있으므로 옳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미추왕 때 신라에 불교가 전해졌다는 ‘아도본비’ 내용도 고구려보다 100여년이 빠르므로 틀렸다고 했다. 일연은 아도를 눌지왕 때 신라로 들어온 인물로 규정했고, 역시 눌지왕 때 신라에 불교를 전한 고구려승 묵호자는 소수림왕 때 고구려에 온 아도와 같은 인물로 보았다.

일연이 헷갈린 것은 아도나 묵호자를 고유명사로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도나 묵호자는 이런 성격을 가진 인물을 지칭하는 일반명사여야 의문이 풀린다. 아도는 아미타(阿彌陀) 불교, 곧 정토신앙을 포교하는 스님이고, 묵호자는 검고 이국적인 얼굴의 서역승을 가리킨다. 그러니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아도는 한 사람일 수 없다. 정토신앙을 포교하는 각각의 다른 스님으로 봐야 한다. ‘아도본비’의 ‘아도’(我道)라는 표기도 이런 혼란의 결과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고구려에 불교를 전했다는 ‘순도’ 역시 고유명사인지 의문을 갖게 된다. 순도(順道)와 아도(阿道)는 같은 작명원리를 다르고 있기 때문이다. 순도는 글자 그대로 ‘올바른 도리’나 ‘도리를 따름’을 가리킨다. 올바른 도리는 곧 불교를 말할 수 밖에 없다. 당시에는 순도가 아도처럼 불교의 어떤 특정한 신앙의 양상을 가리켰는지도 모를 일이다. 진전된 연구가 필요하다.

불갑사 대웅전 ©문화재청

‘삼국유사’는 백제의 경우 ‘침류왕 즉위년(384)에 호승(胡僧)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오니 맞아들여 궁중에 두고 예로써 공경했다. 이듬해(385) 새 도읍인 한산주에 절을 세우고 도승(度僧) 열을 두었는데 백제 불법의 시초’라고 했다. 서역승 마라난타가 바다를 건너 닿은 곳은 영광 땅이다. 그는 영광에 불갑사를 세웠는데, 선운사와 불갑사는 지척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닐만큼 가깝다.

마라난타라는 이름은 아도나 묵호자와는 다르게 일반명사가 아닌 고유명사처럼 보인다. 그런데 일연은 불교의 백제 전파 과정을 서술한 뒤 ‘마라난타를 번역하면 동학(童學)이 된다.’고 한 구절을 더 적어넣었다. ‘젊은 스님‘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마라난타조차 고유명사인지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럴수록 검단선사는 더욱 법명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결국 선운사는 ’얼굴이 검붉은‘(黔丹) 서역승이 창건한 사찰일 가능성이 높다.

 서동철

 서울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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