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 위에서 쓰는 편지]

[오피니언타임스=이호준] 가을이 되면서 여기저기서 초대장이 날아듭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활동하기 좋은 때가 되면 무리부터 짓는 모양이라며 혼자 웃습니다. 초청장이 아니더라도 카카오톡이니 밴드니 하는 ‘문명의 총아’들이 각종 행사 소식을 전하는 메신저로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요즘은 이용자들의 연령대도 높아져서, 50~60대도 소위 ‘단톡방’이라고 부르는 단체 대화방에 활발하게 참여합니다. 제가 다닌 학교의 동문회도 가을에 열리는 큰 행사를 앞두고 단톡방을 열었습니다. 체질적으로 집단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저는 여전히 ‘구경꾼’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얼마전 그 단톡방에서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적 영역에 가깝고 또 공개하기에는 부끄러운 이야기일 수 있지만, 이 시대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갈등 혹은 질곡의 단면이라고 생각해서 글로 남깁니다.

작은 돌 하나가 호수 전체에 파문을 그리듯, 시작은 한 동문이 남긴 짧은 문장에서 시작됐습니다. (인용문은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만 수정합니다.)

이** : 한국당 해체 서명운동 합시다.

이 한 줄이 이**라는 동문이 올린 글의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반향은 컸습니다. 벌집이라도 건드린 것 같은 반응이 즉각 쏟아졌습니다. 그동안 안부를 묻거나 행사 얘기만 하다가 갑자기 한국당 해체 운운했으니 모두 깜짝 놀란 것 같았습니다.

염** : 여기서 뭐야?
조** : 그런 이야기는 안했으면 좋겠네.
박** : 무슨 정치 얘기야?

여기까지만 해도 그런대로 점잖은 반응이었습니다. 평화는 길지 않았습니다. 곧이어 욕설에 가까운 반응이 터져 나왔습니다. 좌우로 갈라져 죽자사자 싸우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판박이 해놓은 것 같았습니다.

주** : 이**가 누군데 여기다 한국당 해체하자 그런 소리 하구 지랄이야. 너 몇 회야? 여기가 정치하는 자리야? 선후배한테 부끄럽지도 않나? 정신 차려라.

이분은 자신 위에는 선배가 없다고 믿을 정도의 대선배인 모양입니다. 이런 과격한 반응에 움찔했는지, 처음 서명운동을 제안했던 ‘후배’는 곧바로 사과합니다.

이** : 죄송합니다.

하지만 ‘대선배’는 이쯤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여전히 강하게 나갑니다. 선후배 간에는 역시 기수가 계급입니다.

주** : 죄송하면 제대로 사과해. 몇 회야?

여기서부터 또 다른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젊은 세대로 보이는 동문들이 우르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탈 대열에 사달의 원인을 제공한 이** 동문도 합류합니다. ‘혼내 줄’ 상대가 없어진 거지요. 그렇다고 상황이 종료된 것은 아닙니다. 기세가 오른 ‘대선배’는 또 한 번 공세에 나섭니다.

주** : 요새 젊은 애들 정신 차려야지. 북한은 핵 만들어 세계가 온통 난리인데 우리나라는 안전불감증에 걸렸어.

이쯤에서 상황이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대개 그렇듯이 그쯤에서 제3의 인물이 나타납니다. 발언이 무척 당당합니다.

김** : 저는 **회 김**입니다. 선배님도 몇 회이신지는 모르지만 그런 표현은 선배님으로서 품위가 떨어집니다. 어떻게 그런 표현을 할 수 있으세요? 선배님부터 이곳에 사과를 하셔야 될 듯합니다. 서로 품위를 지켜주셔야 될 듯합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막말 같은 표현은 절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점입가경이지요? 다음에는 어떤 상황이 전개됐을까요? 예상대로 또 다른 3자가 등장합니다.

박** : **회 박**입니다. 김** 후배님. 주** 선배님 말씀 전에 이**라는 동문님의 적절치 않은 글을 지적하셔야지요. 동문 단톡에서는 아주 적절치 않은 말씀이었어요. 정치적 문제는 정말 자제 부탁드립니다.

‘대선배’의 과격한 발언보다는 자유한국당 해체 운동을 하자는 ‘후배’의 잘못을 지적하는 글입니다. 잠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던 ‘대선배’가 힘을 얻은 모양입니다. 역시 강하게 나갑니다.

“이거 열 받게 하네. 당사자가 아닌데 나한테 시비 거는 거야? 충고하는 거야? 누구든 상대방 당을 해산운동하자고 하면 우리 학교 전체를 욕 먹이는 거고 더한 소리 욕을 먹어야 하고 책임을 져야지.”

이 발언에 대해 다시 반박이 나오면서 약간의 공방이 이어집니다,
김** : 아무리 정치적 발언을 했다 하더라도 표현은 적절치 않았다고 봅니다.
주** : 나한테 뭐하자는 거야?
김** : 이런 표현이 선배님이 하는 표현인가요?

이제 본질은 사라지고 표현에 대한 비난이 오가는 진흙탕 싸움에 가까워졌습니다. 이런 상황이 못마땅한 동문들이 또 우르르 나갑니다. 갈등은 그 뒤로도 계속되지만 비슷한 과정의 반복이고, 더 이상 중계하는 것도 민망해서 이 정도에서 마치겠습니다.

©픽사베이

제 ‘치부’를 드러내면서까지 이런 내용을 전하는 것은,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고질병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돌아보고 생각해보자는 의미이지요. 아시다시피, 정치 이야기나 이념 문제가 불거지면 우리나라 어디서든 흔히 벌어지는 공방입니다. 차라리 이 정도는 점잖은 편이지요. 멱살이나 머리끄덩이를 잡는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토론이 사라진지는 오래입니다.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이길까만 골몰하지 귀를 열고 들어보려고도 안 합니다. 노소(老少) 갈등 마찬가지입니다. 위에서 보듯 체육대회나 등반대회를 통해서 선후배 간의 우의를 다져왔지만, ‘정치’라는 돌 하나를 던지자마자 우의는 사라지고 ‘노인’과 ‘젊은이’만 남아 공방을 주고받습니다.

얼마 전 부산과 강릉에서 ‘사고’를 친 아이들 문제로 나라 전체가 시끄러웠습니다. 아이들이 그렇게까지 되는데 어른들의 책임은 없었을까요? 끄떡하면 서로 공격하고 싸우는 어른들의 모습이 아이들의 성정을 거칠게 만드는데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그 아이들에게 토론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라고 권할 수 있을까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들은 어른들로부터 모든 것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저를 슬프게 하는 ‘단톡방’ 풍경이었습니다. 

 이호준

 시인·여행작가·에세이스트 

 저서 <자작나무 숲으로 간 당신에게>, <문명의 고향 티크리스 강을 걷다>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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