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범의 동서남북]

[오피니언타임스=김준범] 보수를 자칭하는 사람들은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작업을 ‘정치보복’이라고 맞받아친다. 적폐청산의 실체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떤 절차를 밟아 진행되는지 등을 지켜 본 다음 내린 결론이 아니라 처음부터 ‘적폐청산=정치보복’이라는 그들끼리만 통하는 등식을 만들어 낸 것이다.

왜 그런지 답은 분명하다. 촛불민심 위에 탄생한 문재인 정부가 청산해야 할 적폐의 상당 부분은 바로 그들이 저질러 놓은 과오라고 자타가 공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지은 죄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그들이 적폐청산에 그토록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겠는가? 정말 깨끗하다면 ‘어디 해 볼 테면 해 보라’고 정면 대응해야 마땅한 일이다.

물론 ‘적폐청산’이라는 어휘사용의 적절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적폐청산’ 자체가 상대방으로부터 일정 부분 공격받을 소지를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 말은 선거를 앞둔 유세장 같은 데서 짧은 시간에 메시지를 심어주는 데 매우 효과적이고, 사자성어(四字成語)가 갖는 임팩트 만큼이나 선동적인 단어이기도 하다.

서울대 박원호(정치학) 교수는 “적폐청산이라는 말 만큼 사안의 핵심을 가리고 정치적 토론을 중단시키는 언어는 없다”고 말한다. 그 이유를 3가지로 들었다. 즉, 적폐라는 말은 그 자체로서 몰(沒)역사적이고 개인과 구조를 뭉뚱그려 정작 문제의 원인과 책임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가려버리며 토론과 타협의 공간을 없애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앙일보, 2017.11.1, ‘중앙시평’)

그럼에도 불구하는 그는 이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난 정부의 과오들을 덮고 넘어가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과오들이 무엇이며 어떤 범법과 무능이 있었고, 이것이 가능했던 구조적 문제들이 있었는지를 보다 정밀하게 분석·토론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우리 정치가 한 발이라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적폐’라는 말은 너무나 무딘 칼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렇다. ‘적폐’라는 말이 완벽성을 갖추고 있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지난 정부에서 저질렀던 온갖 탈법과 비리, 사상 초유의 국정농단 등을 그냥 덮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오히려 난마(亂麻)처럼 얽힌 지난날의 과오들을 깨끗이 척결하기 위한 정의의 칼(快刀) 치고는 너무나 무딘 게 아니냐는 것이다.

‘보복’(報復)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앙갚음’과 같은 말로, 남이 저에게 해(害)를 준 대로 저도 그에게 해를 주는 것”이라고 나와 있다. 또 “본인이나 같은 집단 사람들이 타인이나 다른 집단에서 육체적·정신적·재산적·사회적 피해를 받은 것만큼 상대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로, 원시시대에는 법률이 없거나 발달하지 않아 이러한 복수가 널리 행하여졌다”고 명시됐다.

그러니까 정치보복은 먼저 자신이 상대방으로부터 보복을 받을만한 무엇을 했을 때 성립되는 것이다. 그들 스스로가 적폐청산을 ‘정치보복’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정치적으로 보복 받을 만큼의 해를 먼저 상대방에게 끼쳤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다. 논리적인 모순 아닌가.

적폐청산을 정치보복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형적인 물 타기 수법 중의 하나다. 오래 전부터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전가의 보도(寶刀)처럼 사용해 왔던 ‘안보 프레임’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정치보복 프레임’의 원조는 과거 박정희 유신 시절부터 권력자들이 신물 나게 우려먹었던 ‘안보 프레임’인 것이다.

70년대 유신 이후 전두환·노태우의 권위주의 정권까지 30년은 안보프레임의 황금기였다. 분단현실을 최대한 악용한 안보프레임은 무소불위의 위력을 발휘했다. 특히 박정희 집권 18년 동안 ‘정보’니 ‘안보’니 하는 말은 국민들에게 무시무시한 공포의 대상이었다. 일반 국민들은 안보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도 불경시(不敬視) 했고, 특권층의 전유물로 인식돼 있었다.

그런 가운데 김영삼(YS)의 문민정부에 이어 김대중(DJ)·노무현 정부가 잇달아 들어서면서 그 전까지 우리 사회를 쥐락펴락했던 안보 지상주의와 안보 독점주의 같은 안보논리가 서서히 퇴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15년에 불과했다. 보수라 자칭하는 세력에게 정권을 빼앗기자 시대의 유물로 휩쓸려갔다고 생각했던 구시대의 안보논리가 다시 고개를 들고 되살아났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은 역사의 역류(逆流)요 구악(舊惡)의 재현(再現)이었다.

MB는 지난 12일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을 정치보복이라고 단정하고, 적폐청산 그 자체를 원천적으로 부정하고 나섰다. 그는 작심한 듯 “새 정부 들어와서 우리 사회 모든 분야가 갈등과 분열이 더 깊어졌고, 지난 6개월간 적폐청산을 보면서 이것이 과연 개혁이냐, 감정풀이냐, 정치보복이냐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며 포문을 열었다. 사실상 전면전을 선언한 셈이다.

MB는 이날 검찰의 국정원 및 군 사이버사령부 수사와 관련, “우리가 외교안보 위기를 맞고 있는데 군의 조직이나 정보기관 조직을 (적폐라고) 무차별적이고 불공정하게 (수사해)가는 것은 우리 안보를 더 위태롭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것(적폐청산 수사)은 국론을 분열시킬 뿐만 아니라 중차대한 시기에 안보외교에도 도움이 되지 않고, 전 세계 경제호황 속에서 한국경제가 기회를 잡아야 할 시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자신이 군 사이버 사령부의 댓글활동 등에 연루됐는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는 언성을 높이며 “상식에서 벗어난 질문하지 마세요. 상식에 안 맞아요!”라고 잘라 말했다. 일방적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쏟아낸 다음 출국 시간에 맞춰 공항을 빠져 나갔다.

이재명 성남 시장은 “당신이 갈 곳은 바레인이 아니라 박근혜 옆”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또 “도둑 퇴치가 도둑에겐 보복으로 보일 수 있지만 선량한 이웃에겐 상식의 회복일 뿐”이라며 “권력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권력을 이용한 범죄라는 이유로 면죄부를 받던 구시대는 이제 박근혜와 당신으로 마감되어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짧은 시간 이날 MB가 쏟아낸 말들은 참모들이 써 준 원고를 사전에 연습해 암기했을 것이다. ‘외교안보 위기’니 ‘국론분열’이니 하는 말들은 과거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과 그 집단에서 즐겨 사용하던 단어들이다. 그러나 재임시절 외교·안보를 위태롭게 만들고 국론을 갈라놓은 장본인이 그런 말을 하니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MB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적폐청산은 정치보복이고, MB는 정치 탄압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묻고 싶다. 만약 문재인 대통령과 그 측근들이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들처럼 청와대를 떠난 뒤 그의 재임시절 저질렀던 국정농단과 비리들이 사실로 밝혀졌을 때 당신들은 과연 그것을 정치보복이니 수사하지 말고 덮고 가자고 주장할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작업은 그것이 대선 공약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추진하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지금은 문 대통령조차도 측근에서 드러난 비위사실을 눈감아 주거나 덮어둘 수 없는 사회분위기가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촛불 이전과 이후의 한국사회는 그렇게 달라져가고 있다.

 김준범

 (주)대한공론 상임 고문

 전 국방부 국방홍보원 원장

 전 중앙일보 정치부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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