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타임스=권혁찬] 한국경제가 IMF라는 비상적 경제상황을 겪은 지 꼭 20년이 됐습니다.

“1997년 11월21일은 우리에게 치욕적인 날이었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신청한 날이죠. 그날 밤 갑자기 불려 나가서 그 긴박했던 순간을 생방송하며 취재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한국경제가 IMF호령에 의해 움직여야 한다는 선언은 충격이었고 그래서 여파도 컸습니다. 외환위기는 큰 고통을 주었습니다. 양극화 심화, 비정규직 문제 등은 위기극복 과정에서 부작용이고 오늘도 그늘로 드리워져 있습니다. 외환위기는 정부당국의 관리능력이 얼마나 막중한지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또한 제때에 메스를 대야한다는 타이밍의 교훈을 새깁니다...”(박영선 의원 트위터)

지난 17일 서울고법 형사7부(부장판사 김대웅)에선 효성 조세포탈 항소심이 있었습니다. 핵심쟁점은 효성그룹의 분식회계가 IMF체제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 여부. 즉 20년 전 정부주도로 진행된 대기업 구조조정이 옳은 선택이었냐 였습니다. 재판에는 이례적으로 IMF때 재정경제부 국제금융담당관으로 실무를 맡았던 진영욱 전 정책금융공사 사장이 증인으로 나와 IMF 당시 구조조정의 불가피성을 역설해 주목을 끌었습니다.

시계를 돌려 20년 전으로 돌아가봅니다.

김대중(DJ) 정부는 IMF 외환위기의 원인을 대기업의 과다차입 경영과 중복 과잉투자로 보고 강력한 구조조정에 나섭니다. 빅딜(대기업 비주력기업을 서로 맞바꿔 전문화시키는 일)과 합병·분사 등으로 계열사와 부채비율을 줄이도록 다그쳤습니다. 대표적으로 LG그룹은 빅딜에 소극적이라는 비판끝에 LG반도체(현 SK 하이닉스)를 내놓아야 했습니다. 구본무 회장이 땅을 쳤지만 돌이킬 수 없는,서슬퍼런 비상조치였습니다.

효성은 당시 매킨지 컨설팅을 받아 효성물산과 효성중공업, 효성생활산업, 효성T&C를 (주)효성으로 통합시키면서 효성물산의 부실을 떠앉는 구조조정을 단행합니다. 수익성이 좋지만 비핵심사업이던 효성바스프와 한국엔지니어링플라시틱,효성ABB 등은 해외기업에 넘깁니다.

효성은 종합상사였던 효성물산에서 부실이 많이 발생했으나 당국의 압력으로 이를 드러내지 못한 채 합병 이후 10년간 영업이익의 일부를 사용해 청산합니다. 이 대목에서 검찰이 영업이익의 일부를 부실청산에 사용한 게 분식회계와 배임, 횡령, 탈세에 해당한다고 보는 겁니다. 이 과정에서 조석래 전 회장이 8900억원대 분식회계를 저지르고 법인세 1237억원 포탈을 주도했다는 것입니다.

효성 측은 '저간의 사정'과 '분식회계의 시대맥락'을 봐야 한다고 항변합니다.

‘당시 부실자산이 많은 효성물산을 청산하려 했지만 효성물산만 파산시켜서는 안된다는 정부때문에 악성 계열사를 안고 갔다. 200% 한도로 부채비율까지 정했기에 부실자산 정리를 위해 회계를 조정할 수 밖에 없었으며 조세포탈 의도는 없었다’는 게 효성 입장입니다.

효성물산 주거래은행인 당시 한일은행도 조석래 회장에게 “살리려면 다 살리고 죽이려면 다 죽여라”(한일은행장 자서전)고 밝혔듯 효성물산만 정리하는 건 안된다 게 정부방침이고 은행 입장이었습니다. 진영욱 전 사장 역시 “효성물산이 법정관리로 가는 걸 정부와 은행 모두가 반대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정부가 효성그룹에 분식회계를 하라고 명령했단 말인가”(검찰)
“정부가 분식회계를 지시한 게 아니라 효성에 자구노력을 하라고 한 것이다. 당시 얼마나 절박하고 어려웠는지 다들 잊고 이제 와서 요즘의 잣대를 들이민다”(진영욱 전 사장)

“효성물산 부실은 사업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다. 초기에 저마진으로 판매하거나 외상 거래를 하는 등 무리한 수출드라이브를 건 측면이 있으며 IMF로 이자비용이 폭등하고 거래처가 많이 부도난 영향도 컸다. 조석래 당시 회장이 위기극복을 위해 개인재산인 골프장,유가증권,조선호텔 맞은편 주차장 부지,중소규모 건물 2~3개를 출연했다”(허영형 전 효성물산 이사)

당시 효성이 합병을 결정하자 금융감독위원회는 “기업 구조조정정책에 적극 호응하여 계열사 3사를 흡수합병함으로써 통합효과를 극대화하고 수익성을 제고하여 국제경쟁력을 갖춘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함”이라며 ‘친철하게’ 효성합병 내용을 보도자료로 배포하기까지 했습니다.

“효성물산은 합병이 아니라 상장폐지 수준이었다.자본잠식돼있고 부실을 공개해선 합병을 할 수 없었다.효성물산 합병때 부실을 전부 공개한다? 정부가 노력해서 끌고 왔는데... 외통수였다. 갈 수 밖에 없었다. 도덕적이진 않지만 안할 수가 없었다”(IMF당시 정부 관계자).

당시 정부 관계자의 말대로 한국경제는 백척간두의 상황. 97년과 98년에만 한보 삼미 진로 해태 쌍방울 등 많은 기업이 연쇄도산하고 97년12월 서울에서만 하루 평균 45개 기업이 부도가 납니다. 환율은 한달새 달러당 960원에서 2000원까지 폭등하고... IMF의 고금리 정책고수와 강도높은 기업구조조정 주문으로 정책당국 또한 비상적 조치에 나서야 했습니다. 재계 4위 대우그룹이 하루아침에 공중분해되고 쌍용그룹(재계 7위)이 해체되는 초유의 비상상황이었던 겁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외신과의 회견에서 재벌들이 계열사를 3~6개로 줄이게 될 것이라고 언급한 이후 30대 그룹가운데 이같은 틀에 맞춰 구조조정안을 제시한 것은 효성이 처음이다”(매일경제 1998년 3월12일자)

“효성은 구조조정 내용이나 과정면에서 경영학의 이론체계와 적절히 맞아 떨어지는 경영혁신의 대표적 성공사례다. 특히 IMF 외환위기 이전에 다른 기업보다 한발 앞서 조석래 회장의 주도아래 구조조정을 추진해 대비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된다”(이학종 박사/한국경영학회 회장 및 연세대 경영학 석좌교수 역임)

효성은 IMF파고를 슬기롭게 넘어와 판덱스와 타이어코드 등 세계 1등 상품으로 사상 최대실적을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IMF악몽에서 벗어나질 못했습니다. 최근 10년새 비자금, 분식회계, 탈세 혐의로 검찰수사만 세번이나 받는 등 수난의 연속입니다.

분식회계 자체에 대한 법적 잣대는 있을 수 있지만, 당시 ‘효성물산의 법정관리가 불가능해 불가피하게 우량계열사와 합병해 기업을 살려낸 노력이 인정돼야 한다’는 게 재계 시각입니다. ‘지금의 잣대’가 아니라 ‘IMF 당시의 잣대’로 사안에 접근해달라는 주문입니다.

‘지금의 잣대’로 재판받고 있는 효성.
정부당국자까지 나서 IMF의 비상적 상황과 정책의 불가피성을 역설하며 변호에 나선 것이 항소심 재판에 얼마큼 반영될 지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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