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화의 참말 전송]

일 년 열두 달 중 두 달은 어떤 말이 자욱한 시간을 산다. 끝과 시작이 함께 있는 말, 아쉬움과 기대가 동시에 찾아오는 말, 후회와 다짐으로 하루를 한 시간쯤 더 살게 하는 말. 바로 ‘연말연시’다. 시간이 주제요 소재이며 행간의 의미까지도 포획하는 말, 그래서 달력과 시계를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이 보게 하는 말, 나이 불문, 국적 불문, 성별 불문으로 자기를 자기답게 바라보게 하는 말, 일 년 치의 온정과 일 년 치의 희망을 주고받을 수 있는 선하디 선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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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나이에 비례해 그 속도를 달리해서 지나간다는 말이 있다. 20대에는 시속 20킬로, 30대에는 시속 30킬로, 40대에는 시속 40킬로, 50대에는 시속 50킬로로 다가오고 지나간다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아직 살아보지는 못했지만 그간의 경험으로 보자면 60대에는 시속 60킬로, 70대에는 시속 70킬로, 80대에는 신호등이 없는 도시 외곽 도로나 고속도로에서나 가능한 시속 80킬로로 시간은 나를 지나갈 것이다.

해가 바뀌고 나는 이제 오십 대 후반에 덜컥 놓였다. 50킬로로 나를 스쳐갔던 시간은 이제 그 속도를 60킬로를 향해 더 낼 것이다. 차를 몰고 서울 시내를 운전해보면 번잡한 도로 사정에 시속 40킬로로 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란 걸 안다. 그런데 시속 50킬로로 그것도 60킬로에 임박한 속도로 시간은 나를 지나갈 수 있다니... 이미 나는, 내 나이는, 도심이 아니라 한적한 외길이나 다른 지역으로 건너가는 고속도로로 접어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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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40대 때까지는 듣기는 했지만 실감은 하지 못했었다. 초중고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의문과 불안으로 하루가 천 일 같았고, 결혼 후 40대 때까지는 아이의 숨소리, 발자국 소리까지 온몸으로 담는 엄마로서의 하루가 늘 길었다. 더구나 30대 초반에 등단 후 두 권의 시집과 두 권의 에세이집, 소설, 공동 집필 등 글과의 끊임없는 대적을 하느라 나 좋아서 하는 일인데도 늘 푸념을 했었다. ‘자고 나면 누가 나에게 오늘이 너의 환갑이야 라고 말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돌이켜보면 얼마나 치기 어린 생각이요, 배부른 소리였는가. 얼마나 시간에 오만했으며 시간 위에 군림하고자 했던가.

그런데 50대, 정확히는 재작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터 내겐 나도 알 수 없는 버릇이 생겼다. 새벽에 눈 뜰 때마다 가장 먼저 날짜와 시간을 불러보는 게 그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세상 떠남을 선포하는 의사의 사망선고를 지금도 그 목소리의 결까지 기억하고 있다. 의사는 날짜와 시간을 말했었다. 이천십육 년 팔월 칠일 오후 네 시 사십 분...

크든 작든 의미가 새겨지는 수많은 시간을 살아왔고 또 살아가야 할 내 앞에 던져진 의사의 목소리. 내 어머니가 이제 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그 날짜와 시간을 들으며 나는 비로소 시간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날 오후 네 시 삼십구 분 오십구 초까지는 산 사람이었던 어머니가 일 초 사이에 죽은 사람이 됐다는 걸 무슨 수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일 초가 생사를 오가는 결정적인 시간일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한 실감은 어머니가 없는 시간을 사는 동안 삶에 대한 경외감으로 이어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 시간을 확인하고 내쉬는 숨을 느끼는 동안 동행하는 모든 것이 귀하고 애틋했고, 저물고 있는 나이에 비례해 쏜살같이 지나가는 시간을 선하게 배웅하고자 하는 배려도 어느덧 몸에 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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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왔으며 졸업 후 취업한 지 3년이 되는 이즈음, 그리고 완벽한 성인이요 사회 구성원으로서 제 몫의 삶을 살고 있는 아이가 결혼으로 부모의 슬하를 떠나게 될 날도 머지않았을 것 같은 이즈음, 알람 소리에 맞춰 눈을 뜨면 침대에 누운 채로 가장 먼저 나는 오늘 날짜와 현재 시간을 소리 내어 불러본다. 새벽만이 아니다. 어떤 날은 수십 번씩 시계와 마주칠 때마다 시간을 불러본다. 오늘 아침에도 그랬었다. 이천십팔 년 일월 삼일 오전 여섯 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커피를 끓이러 주방으로 가다가 시계 앞에 서서 시간을 부른다. 이천십팔 년 일월 삼일 오후 열두 시 오십이 분... 새벽에 내가 부른 시간에서 벌써 여섯 시간이나 지나간 시간이 내 앞에 선다. 시속 오십 킬로를 넘어 육십 킬로에 임박한 속도로 시간은 나를 지나간 것이다.

창밖을 본다. 건너편 동에서 창문을 열고 이불을 터는 여자의 모습이 보인다. 털려나가는 먼지만큼 저 여자의 시간도 지나가도 있으리라. 멀어서 여자의 나이는 짐작이 안 되지만 시간은 공평한 속도로 왔다 가리라.

그저 그렇고 그런 날을 살고 있는 것 같은가. 도무지 탁, 쏘는 일이 없이 어제도 오늘 같고 오늘도 오늘 같다며 지루해하고 있는가. 해 뜨면 아침이고 해 지면 저녁이겠지 하며 날짜도 시간도 잊어버리고 도 튼 사람마냥 느슨해져 있는가.

아니다. 왔다 가기 때문에 늘 새로운 게 시간이다. 저물어야 다시 오는 게 시간이다. 저 건너편 동의 여자만 봐도 이불을 털러 나왔던 시간과 털고 들어가는 시간은 분명 다르다. 먼지가 털려 나가 보송보송해진 이불이 시간의 흐름을 증명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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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져야 또 핀다. 가을의 낙엽은 새봄의 푸름을 예고하는 메신저다. 일몰은 일출을 담보로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 나고 살고 죽고 그 자리에 기적처럼 또 다른 생명이 그 몫의 삶을 이어간다. 내 어머니가 물려준 시간을 내가 살아가며 이어가듯이 언젠가 내가 떠난 시간도 내 아들은 살아가며 이어갈 것이다. 저물지 않으면, 사라지지 않으면, 귀한 것이 아니다. 저물기 때문에, 언젠가는 사라지기 때문에 귀하고 감사해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많은 덕담과 축복이 오가는 새해 첫 달이다. 그전에 우리는 따듯한 위로와 격려를 한꺼번에 퍼부었던 연말을 지나왔다. 저무는 한 해를 견뎌 다시 온 새해를 맞은 것이다.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아들 나이 때문일까? 아들 방을 청소하고 아들 옷을 다리며 아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사다 나르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도 애틋하게 마음을 데운다. 그동안 나는 결혼으로 부모 곁을 떠나왔으면서도 내 결혼이 부모에게 줄 시간의 헛헛함 같은 건 생각지 못했다. 아들을 낳고 키우는 삼십 년 동안에도 자식의 결혼을 보람과 감사와 행복한 그 무엇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머지않아 결혼으로 내 곁을 떠날 만큼 아들은 훌쩍 자랐다. 그런 아들을 보며 세상 모든 부모의 시간을 생각한다. 내 어머니의 시간도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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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고 시간이 속도를 내는 것 같은가. 그렇게 든 나이만큼, 그렇게 속도를 내며 지나간 시간만큼, 우리는 세상에 와서 많은 일을 해냈다. 나이를 먹지 않았으면, 시간이 지나가지 않고 멈춘 것이었다면, 그것이야말로 삶에서 종신형의 형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제, 다가오는 시간은 도시 외곽도로를 그리고 뻥 뚫린 고속도로를 60, 70, 80킬로로 힘차게 질주할 것이다. 주저되고 염려되는 일도 속도에 밀려 줄어들 것이고, 정체에 막혀 분노하거나 옆길로 빠져 돌아갈 꼼수를 찾지 않아도 그냥 나를 데려다주게 길은 넓고 시원하리라. 십 대와 이십 대 그리고 삼사십 대에 시간의 속도가 늦은 건 그만큼 그 나이에는 할 일이 많고 해야 할 의무가 많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다. 반대로 나이가 들수록 시간의 속도도 빠른 건 할 일과 의무로 정체되었던 많은 일들이 빠져나갔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한다. 자, 그렇다면 시간의 속도가 빨라지는 걸 우리는 슬퍼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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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다.
저무는 해를 지켜봤는데 해는 분명 다시 떴다. 아파트 마당의 나무들도 곧 다시 울창해질 것이다.
지금은 이천십팔 년 일월 삼일 오후 세시 삼십일 분이다. [오피니언타임스=서석화]

서석화

시인, 소설가

한국시인협회 상임위원,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한국 가톨릭 문인협회 회원

저서- 시집 <사랑을 위한 아침><종이 슬리퍼> / 산문집 <죄가 아닌 사랑><아름다운 나의 어머니>< 당신이 있던 시간> /  장편소설 <하늘 우체국>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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